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

<9> 왕실 식치, 정향포(丁香脯)와 전약(煎藥)

지금산군사(知錦山郡事) 송희경(宋希璟)에게 장(杖) 1백 대를 때렸다. 송희경이 고을 아전을 시켜 사냥꾼을 데리고 사냥을 하게 하였으니, 정향포(丁香脯)를 공상(供上)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고을 아전 두 사람이 그 잡은 짐승을 사사로이 차지하고 바치지 아니하자, 송희경이 노하여 곤장을 때리니, 두 사람이 다 죽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집에서 원통함을 호소하였기 때문에, 장(杖)에 처한 것이었다.

- 『태종실록』 태종 15년(1415) 5월 17일

『세종실록』에 실린 지리지인 「세종실록 지리지」는 각 도(道)의 역사, 고적, 물산(物産), 지세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중 154권 평안도의 공물을 보면 표범, 사슴, 노루, 여우, 삵 등 각종 동물의 가죽과 석밀(石蜜), 꿀(蜂蜜), 고삼(苦蔘), 함박꽃 뿌리, 칡꽃, 철쭉꽃, 병풍나물뿌리(防風), 뽕나무뿌리껍질(桑白皮), 느릅나무껍질(楡皮) 등 주로 산에서 나는 것들이 많으며 숭어, 민어, 상어, 조기, 가물치(加火魚), 오징어, 큰 새우 등 해산물도 진상되었다. 그런데 이 공물 중 관심을 끄는 게 바로 정향포(丁香脯)다. 이는 세종실록 지리지 151권 전라도의 공물에서도 보인다. 왕에게 올려 지던 정향포는 국가의 대례나 왕실의 음식에도 사용되었다.

정향포는 물고기와 짐승 고기를 특별히 건조하여 만든 포(脯)로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정향(丁香)의 기름에 저며서 만들기 때문에 매우 귀한 음식이었다. 그러므로 정향포의 수요가 늘어날수록 백성의 부담 또한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태종 12년(1412) 5월 19일 간원들은 진상(進上)하는 정향포(丁香脯)는 체제가 대단히 커서, 주군(州郡)에서 괴롭게 여기니 이제부터 민간의 중포(中脯)처럼 그 크기도 줄이고 수 또한 조정하자고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3년 후인 태종 15년(1415) 5월 17일 기어이 불상사가 일어나고 만다. 금산군사(錦山郡事)였던 송희경이란 사람이 나라에 올릴 정향포를 만들기 위해 사냥꾼에게 사냥을 시켰는데 아전 두 사람이 잡은 짐승을 중간에 차지하고 바치지 않은 것이다. 이에 화가 난 송희경이 두 사람을 곤장으로 처벌하다가 그만 그들이 죽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해 송희경은 장(杖) 1백 대라는 처벌을 받게 된다.

조선은 정향을 주로 중국, 일본 유구에서 수입하였다. 태종 1년(1401) 9월 1일 조선의 말 1만 필을 사고 싶다는 명 황제의 뜻이 담긴 병무의 문서를 보면 말과 바꾸기 위한 물품의 하나로 면포, 양강(良薑), 천궁(川芎) 등과 함께 정향을 제시하고 있다. 또 세종 때에는 조공품 중 하나로 정향을 바쳤다.

원산지가 인도네시아의 몰루카 섬으로 알려진 정향은 주로 동남아시아 및 남아시아에서 재배된다. 생긴 모양이 못과 비슷하다고 하여 ‘정향(丁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대개 약재나 향신료로 쓰인다. 상쾌하며 달콤한 향이 특징으로 아로마 치료에서는 정향을 ‘클로브’라고 칭하는데 서양 허브 중 항산화 작용이 가장 강해서 살균, 진통 효과가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향은 계설향(鷄舌香)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항염, 항균, 구충 작용이 있다. 명나라 이시진(李時珍:1518~1593)이 지은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계설향은 곤륜(昆侖)과 교주(交州), 애주(愛州) 이남 지역 등에서 나며 꽃은 자색으로 둥글고 자잘하며 여러 가지 향에 넣으면 사람의 몸을 향기롭게 한다고 하였고 『삼성고사(三省故事)』에 기록된 한(漢)나라 때 어떤 낭관(?官)이 날마다 계설향을 입에 물고 있었는데 아뢸 때마다 입에서 향기가 났다는 일화를 인용해 적어두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정향은 약치 처방과 왕실 식치로 주로 활용했다. 특히, 왕의 몸을 보하는 간식인 전약(煎藥)의 재료가 되었다. 전약은 고려와 조선왕실의 보양 간식이었다. 『고려사』에는 팔관회 때 전약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명종실록』 명종 22년(1567) 1월 5일에는 명종에게 경옥고(瓊玉膏), 생지황(生地黃)과 함께 전약(煎藥)을 진어하길 주청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권익순이 아뢰기를, “방금 내의원의 장무관이 와서 말하기를 ‘오늘은 동지 절일이므로 으레 이른 아침에 전약(煎藥)을 봉진해야 하는데, 세 제조가 모두 공무를 행하지 않아 거행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조 김시환(金始煥)과 부제조 송성명(宋成明)은 정황이 비록 편하지 않지만 세 번이나 소명을 어겼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또 막중한 봉진을 제때에 봉진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제조 김시환과 부제조 송성명을 모두 즉시 불러들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두 분 대비께 상선(常膳)을 드실 것을 청하는 일이 한시가 급한데, 그 도리로 볼 때 어찌 이와 같이 하는가. 즉시 불러들이라. 도제조는 어제 이미 상소에 대한 비답을 받았으니 즉시 들어오라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게 하라.”
하였다.

- 『승정원일기』 영조 4년(1728) 11월 21일

또, 위의 기록을 통해 동지에는 왕실에서 으레 전약을 먹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전약은 동지에 내의원에서 만들어 진상한다. 각 관청에서도 이를 만들어 나누어 갖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창덕궁에는 전약을 고던 은(銀)으로 된 솥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승정원일기』 인조 16년(1638) 5월 13일 “시신(侍臣) 등에게 전약(煎藥)을 나눠 보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왕실에서 전약을 왕족과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유물이 있다. 1792년 12월 19일, 정조는 자신의 활쏘기에 동행했던 규장각검교제학(奎章閣檢校提學) 오재순에게 전약을 하사하였고 이는 고풍문서라는 이름으로 남겨졌다. 고풍이란 왕이 활쏘기를 할 때 수행한 신하들에게 물품을 내리는 일이나 새로 임명된 관원이 관계 부서의 서리나 별감 등의 관리들에게 물품을 내리는 것을 뜻하는데 이날 마침 동짓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정조는 오재순에게 그날 먹을 전약을 내린 것이다.

진상하는 전약에는 수입품인 정향과 계피가 반드시 들어갔다. 계피는 소화를 촉진하고 몸에 열을 내는 효과가 있는데 왕실에 올리는 계피는 베트남 원산지인 육계(肉桂)가 쓰였다.

한편, 내의원에서 만들던 전약 제조법은 점차 민간으로 전해지면서 보양 음식으로 바뀐다. 다양한 재료가 가감되면서 겨울철 원기를 돋우는 음식이 된 것이다. 앞서 보았듯 동짓날에 먹는 전통음식이 된 전약은 소가죽을 고아서 만든 아교를 비롯하여 꿀, 대추고, 생강, 계피, 후추, 정향 등이 들어간다. 『동의보감』에는 전약(煎藥)을 만드는 법에 대해 ‘백강(白薑:건강을 껍질을 벗기고 말린다) 5냥, 계심 2냥, 정향과 호초 각 1.5냥(위의 약들을 따로 곱게 가루 낸다), 대추(쪄서 씨는 빼고 살만 발라내어 고약처럼 만든다.) 2발(1발이 3되이다.) 아교, 졸인 꿀 각 3발.’을 재료로 하고 ‘먼저 아교를 녹인 후에 대추와 졸인 꿀을 넣어 녹인다. 여기에 4가지 약을 넣고 고르게 저으면서 달인다. 약간 따뜻해지면 체에 걸러 그릇에 저장한 후, 엉기면 쓴다.’라고 하였다.

전약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 구하기 어려운 정향과 후추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대신 아교와 꿀이 많아지며 누구나 즐기는 음식이 된 것이다. 이렇듯 전약은 처음엔 왕실의 약치에서 점차 식치로 그리고 민간의 식치로 변화한 것이다.

사람에 대해 성급한 판단을 할까 걱정하는데(相人恒恐失之忙)
그대를 만남과 동시에 굳건함을 느꼈소(唯是逢君意卽强)
흰 머리로 어려운 일 맡는 것도 좋지만(白首甘同鄭燭武)
조선에 큰 인물이 없는 게 아쉽소(靑丘欠一郭汾陽)
피 토하는 심정으로 명에 원병 청하러 가는 길(端須共瀝肝頭血)
입속에 계설향 넣는 것 잠시 잊었다오(?許休含口裏香)
이제부터 나이를 따지지 마십시다(從此無論一日長)
예부터 참된 벗은 겉치레를 모두 벗었다고 하니(古來交道倂形忘)

- 최립(崔?:1539~1612) 『간이집(簡易集)』 「갑오행록(甲午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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