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전 석진(石珍)의 아비가 풍질(風疾)로 날마다 한 번씩 발작하면서 기절하게 되어 석진이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애절하게 기도하며 널리 약을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승려(僧)가 찾아와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광질(狂疾)이 있다니, 참 그런가.’라 하니 석진이 놀랍고 기뻐하며 증세를 자세히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승려는 ‘그 병은 산 사람의 뼈를 갈아 피에 타 먹이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답니다. 그리하여 석진은 자신의 무명지(無名指)를 잘라 피에 타 아버지에게 드렸는데 병이 조금 호전됐고, 두 번째 드리니 병이 다 나았다고 합니다.”
- 『세종실록』 세종 2년(1420) 10월 18일
1420년 그 지역 향교 생도들은 고산 현감에게 아전 석진의 효성에 대해 보고한다. 이를 들은 고산 현감은 전라도 관찰사 신호(申浩:?~1432)에게 전달하고 이는 곧 임금에게 보고되었다. 생도들의 글에는 ‘대개 그 몸을 상하게 해서 부모를 섬기는 것이 효도의 중도(中道)라고 할 수는 없다.’고 전제하였으나 세 가지의 이유를 들어 이를 정려(旌閭:충신이나 효자, 열녀등을 그 마을에 문을 세워 표창하던 일)하고 그 마음을 격려해주길 청했다.
첫째, 아버지가 병든 4년 동안 자기 옷끈을 한 번도 풀지 아니하고 좋은 음식을 한 번도 먹지 아니해 파리한 몸이 되었고 둘째, 날마다 의원과 약을 구하느라 동리 사람이나 족친들의 모임에도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으며 셋째, 부모의 낯빛을 살펴 가며 순하게 받들 뿐, 마음을 거스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세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뜻대로 정려문을 세우게 하고, 석진의 아전 업무를 면제해 주었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세종실록』 11년(1429) 3월 14일에도 기록되어 있다.
서흥(瑞興) 사람 김여도(金汝島)의 딸 김효생(金孝生)이 나이 12세에 그 아비가 광질(狂疾)을 앓았는데, 산 사람의 뼈를 먹으면 즉시 낫는다는 말을 효생이 듣고 비밀히 사람을 시켜 제 손가락을 자르게 하고 부모로 하여 알지 못하게 하고 3일 만에 국에 넣어서 먹이니, 아비의 병이 조금 나았다. 이리하여 본도의 감사가 그 사실을 보고하여 정려문을 세우고 부역과 조세를 면제해 주길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11년(1429) 3월 14일
위 기록처럼 서흥(瑞興) 사람 김여도의 열두 살 딸인 김효생 역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광질(狂疾)을 앓는 아버지를 치료해 석진처럼 정려문을 세우고 부역과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광질(狂疾)은 발작과 뇌전증(간질), 조현병(정신분열병) 등을 포함하는 뇌기능에 이상이 생긴 병증이다. 조선 시대 의원이나 위정자들은 광질 치료에 사람의 뼈가 무관함을 알고 있었다. 의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잘못된 잡술에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던 백성들은 이런 잡술에 미혹되기도 하였다. 석진과 김효생 역시 오로지 아버지가 낫기를 바랐기에 의학적인 근거만을 따질 수 없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치료가 된 것이다. 세종은 백성에게 효의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포상을 했다.
사실 효행을 알리는 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삼국사기』 경덕왕 14년(755)에는 “웅천주(熊川州:현재의 공주)의 향덕(向德)이 가난하여 어버이를 봉양할 수 없자 다리의 살을 베어 그 아버지에게 먹였다. 왕이 소문을 듣고 그에게 많은 물품을 주고, 마을에 정려문을 세워 표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포상이 계속되자 일부 고을의 백성과 관리는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斷指)로 병이 위중한 부모나 남편을 살렸다는 것을 허위로 보고하기도 하였다. 이에 신료들은 “손가락을 끊는 일은 지나친 일이오니, 반드시 이렇게 한 뒤라야 효(孝)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며 포상을 중지해줄 것을 청한다. 일단 그 뜻을 받아들였으나(『세종실록』 세종 23년(1441) 10월 22일)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을 인쇄해 배포하게 하는 등 유교의 효 사상을 온 나라에 널리 전파하려던 세종은 ‘효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나라의 떳떳한 법’이라고 하며 효자를 서용하거나 관직을 제수하는 등 장려를 이어나간다.
한편, 정신질환인 광질은 연산군도 걸린 적이 있다. 『연산군일기』 연산 11년(1505) 9월 15일 기록에 따르면 ‘왕이 두어 해 전부터 광질(狂疾)을 얻었다. 때로 한밤에 부르짖으며 일어나 후원을 달렸다’고 한다. 선조 역시 광질을 앓았는데 『선조실록』 선조 26년(1593) 8월 30일에 이르길 “(내가 광질을 앓아) 때때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곡(哭)을 하기도 하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고함을 치며 달려가기도 하며, 무언가를 보고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놀라 머리털을 곤두세우기도 하였다.”라고 하여 그 증세에 대해 선조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또 『영조실록』과 『한중록』 등을 통해 사도세자는 광병으로 인해, 옷을 입지 못하는 의대병(衣帶病)이나 각종 환시나 환청 그리고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녀나 내관 등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한의학에서는 광질(狂疾)에 광증(狂症), 전광(癲狂), 전간(癲癇) 등이 포함된다. 증상이 양(陽)의 성질이면 광증(狂證), 음(陰)의 유형이면 전증(癲證)으로 분류한다. 『황제내경(黃帝內經)』의 난경 59번째 난(五十九難)의 「논광전지병(論狂癲之病)」에서는 “광증은 처음 발작할 때에 잠을 자려고 하지 않고 또 음식을 먹으려고 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현명하고 지혜롭고 존귀하다고 생각하고 노래를 부르고 웃고 돌아다니기를 그치지 않는다.” 하였고, “전증은 발작을 하면 쓰러지고, 마음이 즐겁지 못하고 눈을 곧추뜨며 바라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광증은 움직이고, 떠들고, 화내고, 욕하는 특징을 보인다. 조현병의 긴장형과 양극성장애(조울병)의 조병(躁病)에서 많이 나타난다. 앞의 예로 보자면, 연산군의 경우가 이 광증에 해당한다. 반면 전증은 조용히 침묵하고, 조리 없이 말하고, 멍한 상태가 많다. 조현병의 망상형, 혼란형이나 양극성장애의 울병(鬱病)의 요소가 강하다. 이 증상은 침울과 어지러움 속에 졸도도 한다. 전증과 유사한 증상으로 간증(癇證)이 있는데 전증은 음적인 증상이 두드러진 정신기능의 실조이고, 간증은 간질발작의 양상으로 구분되고 있다.
세종 때 고산현 석진의 아버지가 날마다 졸도를 하고 한참 후에 깨어났다고 하니 이 전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전간은 유전인자, 심혈 부족, 담(痰)과 스트레스, 비위의 허약 등이 원인이 될 수 있다. 주로 많이 쓰는 처방은 황련사심탕(黃蓮瀉心湯)을 비롯하여 영지화담탕(寧志化痰湯), 양심탕(養心湯), 가감온담탕(加減溫膽湯), 감맥대조탕(甘麥大棗湯), 화광단(化狂丹) 등이 있다.
한의학에서는 정신질환도 장부허실의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치료한다. 한의학적으로 심장과 정신이 관계한다는 측면은 자율신경과 관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의원에서 진단에 사용하는 경락기능검사는 심박변이도를 측정하여 자율신경의 균형도를 판단하도록 데이터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 심박수, 심장의 수축력, 미세심박변화율을 측정하여 심장 박동을 주관하는 자율신경계의 균형도의 결과로 스트레스 지수를 측정하는 것이다. 뇌의 자율신경계가 심근의 수축과 이완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므로 심장의 박동상황을 통해 인체의 정서적 상태를 진단하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인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전적 원인에 의한 정신질환은 완치가 어렵지만, 한의학적 치료를 병행하면 증상완화를 통해 삶의 질을 더 상승시킬 수 있다.
아들의 마음 절박하여 푸른 하늘에 부르짖어.
누가 알았으랴 한 알의 그 영단(靈丹)의 약이
도리어 무명지를 잘라 곱게 갈아 만든 것임을.
부자의 천륜이란 만고(萬古)에 마찬가지로되
어찌 왕의 교화에 따라 더럽혀지거나 융성하랴.
그림을 볼 때마다 늘 높은 풍모를 향해 읍을 하며
그 자자한 명성이야말로 영원하고 무궁하리라.
-『오륜행실도』 「석진단지(石珍斷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