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상담

<26> 세종대왕의 약주와 풍습(風濕)

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
“주상께서 한재(旱災)를 근심하여 술을 드시지 않습니다. 전하의 두려워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술은 풍랭(風冷)을 치료하고 기맥을 통하게 합니다. 한재(旱災)가 있다고 술을 드시지 않으신다면 성체(聖體)에 병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 『세종실록』 세종 8년(1426) 4월 16일

세종 8년 그해 겨울은 유난히 따뜻해 눈이 오지 않았다. 보리가 여물고 또한 씨를 뿌릴 시기가 되었음에도 비가 오지 않자 임금의 걱정은 더욱 심해졌다. (『세종실록』 세종 8년 4월 6일) 이를 근심하여 술을 마시지 않는다. 며칠이 지난 4월 16일 그날 아침 마침 감로(甘露:생명에게 이로운 이슬)가 내리자 대신들이 하례를 청한다. 그러나 임금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오늘의 단비를 상서롭게 생각하기보다는 그동안 내리지 않은 비를 재변(災變)으로 여긴 탓이다. 그러한 세종의 걱정을 이해하면서도 신하들은 건강을 위해 술을 드실 것을 권했다. 왕실과 민간에서는 한두 잔 술을 질환 예방 차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에 세종은 말했다. “내가 본디 술을 좋아하지 않으며, 비록 마신다고 해도 한두 잔에 불과하다. 지금은 몸이 아프지도 않으니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병이 생기겠는가. 그래도 약용으로 술이 필요하면 염탕(鹽湯)을 마시겠다.” 염탕은 소금 끓인 물이다. 주로 종기 등의 해독에 쓰인다. 하지만 신하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건강하다고는 하지만 술로 혈액순환을 강화하지 않으면 몸이 약해질 수도 있음을 주장했다. “술을 드시지 않으면 아침저녁으로 풍습(風濕)의 독기가 몸에 맞아 병으로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약용으로 한두 잔 드시는 것입니다. 술을 흠뻑 마시어 근심과 걱정을 잊으시라는 게 아닙니다.” 임금은 그런 신하의 정성을 어루만지며 결론을 내렸다. “그대들은 내가 예전에 근심과 걱정으로 병을 앓았음을 생각한 것이다. 그때에는 음식에서 반찬을 반이나 줄인 탓에 몸이 약해진 것이다. 지금은 술만 마시지 않는데 병이 생기겠는가. 또 다른 사람에게는 금주를 명하고 나만 홀로 마신다면 되겠는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옛사람은 병이 나거나 허약할 때 약간의 술을 약으로 생각하고 마셨다. 또 약을 복용 때 술을 곁들이기도 했다. 열두 살에 왕이 된 단종은 아버지 문종의 상례로 지쳐있었다. 이에 대신들은 영양식인 타락죽과 함께 소주로 몸을 추스를 것을 권했다.(『단종실록』 단종 즉위년(1452) 6월 2일) 이를 통해 당시 왕실에서도 술을 원기회복의 약으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음주를 즐기지 않는 세종에게 술은 달갑지 않았다. 약용으로 가볍게 마시는 정도였고, 그것도 멀리하며 혈액순환으로 마시는 술을, 소금물로 대신하곤 했다. 세종 4년 태종이 승하하자 그 슬픔과 더불어 때마침 내린 큰비로 습한 기운이 대궐에 가득했다. 신하들은 몸을 위해서 억지로라도 술을 마실 것은 권하자 세종은 “내 성질이 술을 좋아하지 않아 마시지 않는 것이 편하다.(予性不好酒, 以不飮爲安)”라고 말하지만 계속된 간청에 반 잔만을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세종은 술을 아예 못 마셨을까. 그것은 아니다. 세종은 뛰어난 업무 능력과 함께 주량도 갖추었기에 왕이 될 수 있었다. 양녕대군이 폐사자 된 후 다음 보위의 후보는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으로 좁혀졌다. 그런데 태종은 후계자로 둘째 왕자 효령대군이 아닌 셋째 왕자 충녕대군을 낙점한다. 그 이유를 태종은 술로 설명한다.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無益)하다고 하지만,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壯大)한 놈이 있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不可)하다. 충녕대군이 대위(大位)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 『세종실록』 태종 18년(1418) 6월 3일

이처럼 세종은 좋아하지 않았던 것뿐 선천적으로 마시지 못하는 체질은 아니었다. 세종은 술에 대한 폐해와 훈계를 담은 내용의 글을 주자소에서 인쇄하여 반포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옛 중국의 나라들과 신라, 백제의 멸망 원인이 술에 있다고 본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고려의 정치가 문란해진 것 역시 술에 빠져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보았다. (『세종실록』 62권, 세종 15년(1433) 10월 28일) 따라서 세종은 개인적 취향과 정치적인 신념으로 사실상 금주를 실천한 것이다. 술의 약용 또한 그리 중히 여기지 않아 세종에게 있어서 술은 기호품이 아닌 주로 하사품, 외교접대, 제사의례용에 가까웠다.

앞서 살펴보았듯 세종은 풍질(風疾)의 가족력이 있었다. 할아버지 태조. 큰아버지 정종, 아버지 태종까지 풍질이 있었다.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 7월 17일 기록을 보면 경기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 우희열(禹希烈)에게 약과 술을 주었는데 풍질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나오는 술의 약효도 풍한사기(風寒邪氣)를 없애고 혈맥(血脈)을 통하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신하들이 세종에게 약주를 청한 것은 단순히 찬 몸을 보호하는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또한, 『동의보감』에도 약과 함께 술을 복용하도록 하는 처방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약의 효과를 촉진하는 용도까지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세종실록』 세종 18년 7월 23일 ‘아침에 약을 먹기 때문에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술과 한약재의 조합은 풍한으로 인한 관절 통증에도 많이 쓰인다. 요즘에는 제제(製劑)로도 개발된다. 일례로 한의사 배원식(裵元植)이 창방한 ‘활맥모과주(活脈木瓜酒)’가 있다. 근골격계에 유효한 한약재를 술로 추출할 때 가장 약효가 높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이 처방은 ‘레일라정‘이라는 관절염 치료용 제제로 만들어졌고, 2015년에는 총매출 170억 원을 기록하기도 하였으나, 모순되게도 법규상 한의사는 처방하지 못한다.

술은 오곡의 진액이고 쌀누룩의 정수이다. 사람을 이롭게도 하지만 상하게도 한다. 왜냐하면, 술은 열이 많고 매우 독하기 때문이다. 몹시 추울 때 바닷물은 얼지만 술이 얼지 않는 것은 열이 있기 때문이다. 술이 사람의 본성을 변화하게 하여 어지럽히는 것은 독이 있기 때문이다. 풍한(風寒)을 쫓거나 혈맥을 잘 통하게 하거나, 사기(邪氣)를 없애거나 약의 기세를 이끄는 것은 술보다 나은 게 없다. 그러나 술을 취하도록 마셔 한 말이나 되는 술동이를 비우면 독기가 심장을 공격하고 장(腴)을 뚫어 옆구리가 썩으며, 정신이 혼미하고 착란 되며,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 이는 생명의 근본을 잃은 것이다.

- 허준(許浚:1539~1615), 『동의보감(東醫寶鑑)』 「주상(酒傷)」

SNS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