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상담

<27> 세종의 건강을 지킨 자하젓(紫蝦醢)

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
마른 고등어 2궤짝(櫃)과 어린 오이(童子瓜)를 섞어 담근 자하젓(紫蝦醢) 2항아리를 영접도감(迎接都監)에 보냈다. 백언(白彦)이 진헌(進獻) 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 『세종실록』 세종 8년(1426) 6월 16일

세종 8년(1426) 2월 15일, 평안도 관찰사는 사신 윤봉(尹鳳)과 내사(內史) 백언(白彦) 등이 중심이 된 명나라 사신이 조선을 향하고 있음을 보고한다. 윤봉과 백언은 모두 조선 출신으로 이 중 백언의 고향은 수원이었다. 당시 백언의 부모가 수원에 살고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그의 본가를 수리하고, 형인 백용(白龍)에게 좋은 옷을 입혀 의주로 사신을 마중 가도록 하였으며 어머니에게 옷과 신 등을 하사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사신단이 떠나기 얼마 전, 조선은 사진을 맞는 임시관청인 영접도감을 통해 백언에게 자하젓 두 항아리를 보낸다. 백언이 자하젓을 명나라 황제인 선덕제에게 바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세종실록』 세종 10년(1428) 2월 11일에는 백언이 찬녀(饌女)를 시켜 술, 과일, 두부(豆腐)를 만들어 올리니, 황제가 기뻐하며 백언을 어용감소감(御用監小監)으로 제수하고 관대(冠帶)를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평소에도 황제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 올렸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세종실록지리지』 「수원 도호부」에 따르면 자하(紫蝦)가 산물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니 백언은 어린 시절 자신이 즐겨 먹던 맛있는 음식을 황제에게 올리고자 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 조정은 세종 11년(1429) 7월 19일에도 다양한 수산물을 선물하는데 황어젓, 잉어젓, 토화젓, 굴(石花)젓, 생합(生蛤)젓, 송어젓, 백하(白蝦)젓, 조기 새끼젓, 홍합젓 등과 함께 자하젓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하는 1~2cm 크기의 작은 갑각류다. 여덟 쌍의 가슴다리가 있는 데 생김새는 큰 새우와 같다. 바다에서 바로 잡았을 때는 투명한데, 젓을 담그면 붉은색으로 숙성되며 갑각의 색도 자주색이다. 때문에 붉을자(滋)에 새우하(蝦)의 이름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해(醢)는 젓갈이나 고기젓을 뜻한다.

맑은 청정해역에서 서식하는 자하의 육질은 아주 부드럽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주주로 해주, 연안, 수원 남양 등의 황해도와 경기도 등 서해 중부에서의 산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은 충남 서천에서 가장 많이 어획되는데 자하젓은 서해안의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8~9월에 잡은 새우로 만든다.

『세종실록』 세종 6년(1424) 8월 17일에는 세종이 “황해도 감사가 진상하여 올린 자하젓(紫蝦醢) 중 극히 정결한 것을 가려서 저장해 두고 그 수효를 갖추어 아뢰라.”는 명을 내린 기록이 있다. 또 정조 14년(1790) 8월 18일 『일성록』에 기록된 황해 감사 이시수(李時秀)의 장계에 따르면 황해도에선 자하(紫蝦), 세하(細蝦), 하란(蝦卵), 감동(甘冬) 네 가지의 젓갈(醢)를 봉진하였는데 이 중 자하젓의 경우 3월령과 9월령 두 차례 봉진하는 것이 원칙으로 삼월령은 7두(斗) 7승(升)으로 해주(海州)와 연안(延安) 2개 읍이 나누어 담당하고 구월령은 6두 1승으로 연안읍이 전담하였다고 한다. 이어 그는 이를 봉진 함에 있어 여러 폐단이 있음을 아뢰니 정조는 그 폐단을 시행하라고 하면서 감동젓(자하젓)은 세 차례 봉진하는 것을 영구히 정식으로 삼으라 하기도 하였다.

이는 자하젓이 봉진 물품으로 궁에서 매우 귀하게 쓰였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조선과 명나라의 임금에게 올려지며 중요한 외교 품목이기도 했던 자하와 자하젓은 생활이 넉넉한 집에서도 즐겼는데 이에 따라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허균이 지은 음식품평책인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자하에 대해 “서해에서 난다. 옹강(瓮康)의 것은 짜고, 통인(通仁)의 것은 달고, 호서(湖西)의 것은 매우면서 크다. 의주(義州)에서 나는 것은 가늘고 달다.”라고 하였고, 숙종 때 홍만선이 편찬한 『산림경제』에서는 물고기를 먹고 중독이 되었을 때의 처방으로 자하젓이나 생자하(生紫蝦)를 먹으면 좋다고 기록하고 있고 최한기가 쓴 『농정회요(農政會要)』에는 “자하젓은 복어의 독을 잘 해독하여 준다.”라고 하였다.

영조 때 의관이었던 유중림이 『산림경제』를 증보하여 영조 42년(1766)에 간행한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자하젓 만드는 법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복, 소라, 오이, 무에 소금을 듬뿍 뿌린 뒤 저장한다. 자하가 날 시기에 네 가지 재료의 소금기를 뺀다. 소금으로 간한 자하를 네 가지 재료와 함께 항아리에 켜켜이 넣는다. 기름종이로 항아리 입구를 봉한 뒤 땅에 묻는다. 뚜껑을 꼭 덮고 항아리 입구를 타고 남은 재로 둘러 바르고 묻는다. 오래도록 두면 맛이 더욱 좋다.

- 유중림(柳重臨)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숙종 38년(1712) 북경에 사절로 다녀온 김창업(金昌業:1658~1722)은 『노가재연행일기』에서 요동의 소릉하에서 자하젓을 맛본 후 “통역이 감동즙(甘冬汁) 한 병을 사왔다. 맛이 몹시 좋다기에 가져오라고 했다. 즙이 기름처럼 맑았다. 돼지고기를 찍어 먹으니 참으로 맛있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또 요동의 자하젓에 대해 병자호란 때 사로잡혀 온 사람들에게 퍼진 것이라고 하였다. 김창업의 기록에서 보듯 자하젓(紫蝦醢)을 감동(甘冬)젓이라고도 하였다.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선 1923년 지어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그 일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중국 사신이 해주를 지나다가 이 젓을 맛보더니 눈물을 흘리고 차마 먹지 못하자 조선 관리인 원접사가 그 이유를 묻자, 사신이 말하길 내 노모가 만 리 밖에 계신데 이런 맛을 못 잡수시니 그로 인하여 감동하여 먹지 못하노라 하였다 하기로 감동젓이라 하였다고 한다. 감동(甘冬)이란 맛이 사라졌다는 뜻으로 감동(甘動), 감동(甘同) 등으로 표현하였다.

또 자하의 토속 이름은 곤쟁이 혹은 권쟝이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발음을 한자어로 표기할 때는 ‘곤정(袞貞)’ 또는 ‘권정(權停)’이라 하였다. 중종 때 김정국(金正國:1485~1541)이 쓴 『사재집(思齋集)』에도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남아있다.

박세평은 우스갯소리를 잘 하는 사람으로 음성에 살고 있었다. 이자(李耔)가 기묘사화로 퇴거해 음성에 머물고 있을 때...(중략)...하루는 자하(紫蝦)와 오이(靑苽)로 섞박지(交沈菹, 속명은 감동저(感動菹))를 만들어 보내어 선사하며 말하기를 “이 김치는 심히 자미(滋味)가 있다. 공이 반드시 감동(感動)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공이 편지로 회답하며 사례하여 끝에 덧붙이기를 “삼가 별미를 받고 감동함이 있었습니다. 단지 그대가 거칠고 실속 없는 말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세상 사람들이 이 때문에 낮추어 보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권정(權停, 자하의 속명은 권정이다.)으로 함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박세평은 우스갯소리 하는 습관만 있었지 기교에 능하지 못하였으나 이공은 우스갯소리는 못하여도 대응하는 말에 뛰어났음이다. 이 말을 듣는 자들이 웃었더라.

- 김정국 『사재집(思齋集)』「척언(摭言)」

‘곤정(袞貞)’은 기묘사화를 일으킨 인물인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의 각 이름을 따서 한 번에 칭하는 말이다. 박세평은 자하(紫霞)의 속명이 곧 곤쟁이라는 점을 이용해 간신인 이 두 사람을 비판하며 동시에 이를 주재료로 담근 감동저를 먹으며 이자(李耔)가 위안을 얻는 감동이 있기를 바랐다. 평소 우스갯소리를 잘하던 박세평이 그의 마음을 해학적으로 위로한 것이다.

16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글 요리책 『주초침저방(酒醋沉菹方)』에는 “감동저(甘動葅)는 어린 외(童子苽)를 따서 소금물에 하룻밤 재웠다가 꺼내 반건조시킨 후 자하젓(紫蝦醢)과 섞는다. 어린 외를 매우 끓는 물에 데쳐 반건하여 섞어 담가도 좋다.”고 하였다. 또 김경선의 『연원직지』에도 “(요동의) 예부터 전하기를, 이곳의 곤쟁이젓(紫蝦醢)은 우리나라의 감동젓(甘同醢)과 같으며, 그 속의 오이지는 더없이 아름다워 저두자(猪肚子)라고 부르는데, 절편(切片)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여러 글을 통해 자하젓을 만들 때도 혹은 감동저 등의 음식을 만들 때 오이를 같이 넣어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오이는 소양인 채소로 갈증 해소에 좋은데 『동의보감』에는 “부은 데 찧어 붙이면 좋고, 장위(腴胃)를 잘 통하게 하고 답답하고 목마른 것을 멎게 한다.”고 하였다. 또 “소주를 지나치게 마셔 중독되면 얼굴이 퍼렇게 되고 입을 악물며, 정신이 혼미하여 인사불성이 될 때 오이나 덩굴을 찧어 낸 생즙을 입을 벌려 계속 먹이면 점차 깨어나면서 낫는다.”라고 하였다. 이밖에도 오이는 화상이나 발열 등의 치료에도 활용되었다.

세종을 비롯한 역대 임금들의 건강과 입맛을 지켰을 것으로 보이는 자하젓은 소화 기능 강화에 도움이 된다. 자하젓 등 새우젓에는 프로타아제와 라파아제 그리고 칼슘 등 각종 무기질이 함유되어 있다. 따라서 소화력 증진, 면역력 강화, 피부염 예방을 기대할 수 있다. 또 육질을 빠르게 분해하는 효소도 있는데 이는 앞서 김창업이 돼지고기를 자하젓에 찍어 먹은 후 최미(最味) 즉 참으로 맛있었다고 말한 배경이 된다.

식치에서 약효를 극대화시키는 방법 중 하나가 발효이다. 한국의 발효음식은 장류, 김치, 젓갈 세 가지로 대표되는데 그 중 젓갈은 삼면이 바다라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지방마다 계절에 따라 다양한 종류로 전승되었다.

자하와 푸른 오이 함께 소금에 담가(蝦紫瓜靑共漬鹽)
한 항아리 가득히 담았다가 꺼내니 대단히 맛이 있네(一缸盛出十分添)
겨울 봄 몇 번을 먹을 수 있어 다행이라네.(冬春所寄三爲幸)
땅과 바다의 보배 두 가지를 함께 넣었는데 (陸海之珍二者兼)
홀연히 기쁘고 새 단지를 또 여니(忽喜新緘今又到)
부끄럼 모르는 걸신들린 늙은이 입맛이 싫증 낼 줄 모르네.

- 이안눌(李安訥:1571~1637) 『동악집(東岳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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