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끈한 국물이 당기는 계절. 뽀얗게 우러난 사골 국물에 밥 한 공기를 척 말아 본다. 잘 익은 깍두기 하나를 곁들여 한 숟가락 넘기면 겨울의 추위도, 일상의 노곤함도 금세 누그러진다. 개포동 주택가, 식당을 좀체 찾아볼 수 없는 골목 모퉁이에 자리잡은 ‘토방설렁탕’의 점심 풍경. 김선하 대표는 삶의 희망이자 이웃들의 따뜻한 한 끼를 위해 오늘도 뭉근히 사골을 우려낸다.
8시간 끓이는 사골, 국물이 끝내줘요
“설렁탕을 제대로 만들려면 24시간이 부족해요. 10시간 동안 핏물을 여러 차례 빼내고, 8~9시간을 푹 끓여야 깔끔하면서도 진한 맛과 색이 우러나거든요. 그래도 힘든 줄은 모르겠어요. 뽀얀 사골 국물이 팔팔 끓는 모습을 볼 때가 가장 행복하거든요.”
토방설렁탕 김선하 대표는 설렁탕 한 그릇을 뚝딱 차려낸다. 손님상에는 금방 내놓지만 그 한 그릇을 위해 뼈를 손질하고 끓여내는 데 하루가 꼬박이다. 비위가 약해 냄새나는 국물은 잘 먹지 못했던 김대표는 본인이 좋아하는 스타일대로 잡내와 비린내가 없는 사골 국물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질 좋은 한우 사골만을 골라 핏물을 완전히 빼는 것은 기본, 8시간 이상 고아내며 기름기를 최대한 제거하는 게 비법이다. 설렁탕에 빠질 수 없는 김치와 깍두기도 김대표의 손맛으로 버무려진다.
“설렁탕은 김치, 깍두기와의 조화도 중요하잖아요. 김치 맛으로 설렁탕집을 찾는 분도 있으니까요. 내 가족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직접 담급니다. 이제는 저희 어머니 김치 솜씨를 뛰어 넘은 것 같아요.”
깔끔하고 정갈한 설렁탕과 소우거지국밥 한 그릇에 끌려 이웃 주민들과 인근 재건축 공사 현장 일꾼들이 토방설렁탕을 찾는다. 한적한 주택가 안쪽에 자리잡아 입지는 좋지 않지만 야금야금 입소문을 타면서 하루에 60~70그릇은 너끈히 팔리는 중이다.
식당 창업, 마지막 기회라는 간절함
상권이랄 게 없는 대로 이면의 골목. 김선하 대표가 이곳에 터를 잡은 건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식당을 열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보통 기존에 식당이 있던 자리를 찾아보기 마련이지만 김대표는 신문사 사무실이 있던 이곳이 눈에 들어왔다.
“남들이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결정이었죠. 한쪽에 인쇄 찍는 기계가 있고, 책상만 몇 개 놓인 사무실이었어요. 1주일 간 고민을 하다 계약을 하기로 했죠. 그런데 이번에는 건물주가 말리는 거예요. 아무래도 식당을 하면 안 될 자리 같아 마음이 아파 못주겠다는 거죠. 무슨 배짱이었는지 ‘내가 알아서 하겠다’하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주방 설비 하나 제대로 갖춰지지 않는 덩그런 사무실을 식당으로 만들기 위해 김선하 대표는 직접 발로 뛰었다. 영세 자영업자가 그렇듯 황학동 중앙시장을 누비며 필요한 물품을 직접 사고 전기 기술자인 동생이 합류에 15일 동안 뚝딱 공사를 마무리했다.
사실 김선하 대표에게 장사가 처음은 아니었다. 스무네 살부터 카페와 주점을 꾸준히 운영해온 경험은 풍부했다. 그 사이 IMF에 크게 휘청거리기도 하고, 경기에 따라 늘 불안하게 오르내리며 성공담보다 실패담을 더 많이 쌓기 했지만 말이다. 사업을 접고 새로 차리기를 반복하다 처음으로 음식점에 도전한 이유는 딸 때문이었다. 직전까지 대치동에서 9년 정도 카페 겸 주점을 운영하던 김선하 대표는 딸과의 시간을 늘리고 싶은 마음에 집 인근, 상권도 없는 골목에서 음식점을 일구기로 결심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여기서 꼭 승부를 봐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연지 4개월쯤 됐을까요? 가게 안 내놓을 거냐고 문의하는 분들이 오더라고요. 처음에 보리밥집으로 시작했는데 정말 손님이 없었거든요.”
보리밥 한 그릇을 위해 11가지 재료를 준비해놓고 손님을 기다렸지만 발길은 가물기만 했다. 보리밥이 문제인가 싶어 청국장으로 메뉴를 바꿨다. 청국장 한 박스를 끓이고 또 끓이며 맛을 연구하는 데 공을 들인 시간도 셀 수 없다. 여기서 일어서지 못하면 다른 데서도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다 2017년 초, 새로운 메뉴 개발을 위해 사놓은 뼈를 보고 번뜩 떠오른 것이 지금의 ‘설렁탕’과 ‘소우거지국밥’이었다.
노란우산공제, 소상공인의 든든한 울타리
물론 카페를 접고 곧장 음식점 창업에 뛰어들진 않았다. 30년 가까이 장사를 하며 얻은 가장 값진 배움은 무작정 덤벼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김선하 대표는 요식업으로 방향을 정한 다음 2년 반 동안 주방만 담당하는 식당일을 하며 현장을 배웠다.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만 할 때도 있었어요. 그래도 식당 운영의 기본을 배우고 현실을 깨닫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죠. 차 한 잔 내놓으면 끝인 카페와 주 메뉴에 반찬까지 세팅해야하는 식당은 차원이 다르더라고요. 기존의 습관을 모두 버리기 위해 힘들어도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죠.”
5시간 동안 쉬지 않고 설거지를 하고 손에 쥔 3만 5천원. 버스를 타고 집에 오다 그 돈이 주머니에서 빠지고 없는 걸 안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낸 적도 있다. 하지만 김대표는 이내 ‘나보다 더 어렵고 힘든 사람이 가져가길 바란다’며 간절히 기도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을 것, 눈물은 흘려도 희망을 잃지는 않는 것. 이것이 우리 시대 소상공인이 버티는 힘이자 김선하 대표가 꿋꿋이 걸어올 수 있었던 힘이었다.
혼자 음식을 만들고 혼자 서빙하고 혼자 설거지를 하며 분주하게 토방설렁탕을 일군 김선하 대표. 기댈 곳 하나 없이 장사를 시작한 김대표에게도 얼마 전 든든한 동반자가 생겼다. 한국외식업중앙회 활동을 하며 소개받은 노란우산공제가 주인공이다. 그동안 가게를 접을 때마다 대안 없이 힘든 시절을 보냈던 김선하 대표에게 여러모로 반가운 서비스였다.
“뭐 하나 모자람이 없어 고민 없이 선택했습니다. 세금 혜택도 주고, 수익률도 괜찮고요. 무엇보다 형여 그만둔다 해도 퇴직금은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에 참 든든했습니다. 늘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생각해주는 것 같아 따뜻하게 느껴졌어요.”
믿고 응원해주는 누군가가 있으면 힘이 나기 마련이다. 설렁탕으로 희망을 불씨를 일군 김선하 대표에게 노란우산은 어려울 때 바람막이가 되어줄 든든한 친구다. 장사만 30년 째, 김대표는 이제야 기댈 곳 하나가 생겼다.
토방설렁탕, 희망을 키우는 한 그릇
“지금은 대박집도 아니고 성공했다고 할 수도 없죠. 그래도 딸이 다시 제 곁으로 다가오게 됐고, 설렁탕과 국밥을 꾸준히 찾는 단골도 생겼습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대규모 재건축 단지가 완공을 앞두고 있거든요. 새로 입주할 이웃들을 단골로 맞을 준비를 해야죠.”
점심에는 설렁탕과 국밥, 저녁에는 전과 막걸리가 제대로 어울린다며 해물파전 한 장을 노릇노릇 구워내는 김선하 대표. 겨울에는 굴전도 일품이라고 슬쩍 솜씨 자랑도 더해본다. 재료를 아끼지 않는 두툼한 파전 한 조각이 겉은 바삭, 속은 고소하게 입맛을 깨운다. 음식점을 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손님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이 가장 효과 좋은 피로회복제다.
“잡념 없이 사골을 우릴 때가 가장 행복한 이유는 이 국물이 제겐 희망이기 때문이죠. 그 국물로 만든 설렁탕과 국밥을 손님들이 말끔히 다 비웠을 때 가장 뿌듯해요. 이웃들이 많이 찾는 식당인만큼 지금 오시는 손님들이 자식들과 함께 오고, 그 자식들이 아이를 낳아 또 함께 오는 식당이 되면 좋겠어요.”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푸근하고 정겨운 고향집 같은 식당. 김선하 대표가 꿈꾸는 토방설렁탕의 내일이다. 힘들과 지쳐도 꺼지지 않는 이 희망이 사골을 더욱 진하게 우려되는 비법이 아닐까. 한적한 골목식당에서는 오늘도 설렁탕이 끓고, 그 설렁탕으로 한 끼를 든든히 채우러 오는 이웃이 있다. 토방설렁탕과 김선하 대표가 오래도록 자리를 지켜야하는 이유다.
토방설렁탕
주소 | 서울 강남구 선릉로8길 20
주요 메뉴 | 토방설렁탕, 소우거지국밥, 해산물파전, 소수육 등
영업시간 | 11:00~2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