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

<1> 왕자의 출산과 한약

세종대왕의 휘는 도(?)요, 자는 원정(元正)이다. 태종대왕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의 셋째 아드님이시다. 태조 6년 정축 4월 임진(壬辰)에 한양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에서 탄생하셨다.

- 『세종실록』 1권 총서

세종대왕은 1397년 5월 15일(음력 4월 10일) 잠저(潛邸)인 준수방(俊秀坊)에서 태어났다. 잠저란 왕이 되기 전 살았던 집을 일컫는 말이다. 경복궁의 서쪽에 있었던 준수방은 한성부 북부 12방 중 하나로 현재 서울 종로구 통인동과 옥인동 일대이다. 태어날 때 공식적인 세종의 신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손자이자 왕실의 종친(宗親)이었다. 훗날 태종(太宗:재위1400~1418)이 되는 아버지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은 정안군(靖安君)으로 봉해진 왕자였으므로 그 자녀의 출산은 왕실로선 경사였으나 국가적 관심 사안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종의 탄생은 여느 왕족의 태어남보다 차분하고 조용했다.

당시, 조선건국에 큰 공을 세웠으나 정도전(鄭道傳:1342~1398), 남은(南誾:1354~1398) 등 공신들과의 권력다툼에 밀려 은인자중하던 때였다. 나중에 세종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이 된 태종은 그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내가 젊은 시절에 아들 셋을 연이어 여의고 갑술년(1394년)에 양녕(讓寧)을 낳았는데, 그도 죽을까 두려워서 본방댁(本房宅)(즉 여흥 부원군)1) 여흥부흥군 민제(閔霽:1339~1408)는 태종의 비 원경왕후의 아버지로 태종의 장인이자 세종의 외할아버지이다.
에 두게 했고, 병자년(1396년)에 효령(孝寧)을 낳았는데, 열흘이 채 못되어 병을 얻었으므로, 홍영리(洪永理)의 집에 두게 했고, 정축년(1397년)에 주상을 낳았다. 그때 내가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인해 형세가 용납되지 못하게 되니, 실로 남은 날이 얼마 없지 않나 생각되어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낙이 없었다.”

-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1419) 2월 3일 -

이처럼 하루하루 생사의 살얼음판을 걷고 있던 정안군의 집에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는 손님이 구름떼처럼 몰려올 리 만무했을 것이다. 그러니 고작 가신과 친지들만의 조촐한 축하만이 다였을 터다.

조선 시대, 궁궐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이들은 왕비와 세자빈, 후궁 그리고 성은을 입었으나 아직 후궁이 되지 못한 여인들뿐이었다. 그런데 왕비와 세자빈 이외 여인의 대궐 안 출산은 시기마다 달랐다.

후궁이 공식적으로 대궐에서 아이를 낳는 길은 선조 임금 때 열렸다. 이전에는 후궁은 친정으로 보내어 출산하게 하였으나 선조 임금의 후궁이었던 공빈 김씨와 숙의 정씨가 산고병(産苦病)으로 죽자 마침내 대궐 안에서 해산을 기다리게 하는 법령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선조수정실록』 13년(1580) 11월 1일) 하지만 조선이 건국된 직후에는 후궁이 궁궐에서 출산한 사례도 있다. 이는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제도가 정착되지 않은 탓이었다.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는 여섯 왕자를 낳았다. 이 중에 2남인 익현군은 경복궁에서 출생한 게 확인된다. 세종의 또 다른 후궁인 혜빈 양씨가 낳은 3왕자 중 둘째 수춘군도 대궐에서 태어났다.2)

내 아들인 밀성군(密城君)과 의창군(義昌君)은 궁밖에서 자라서 그 마음이 겸손하다. 그러나 수춘군과 익현군은 궁중에서 생장하여 편벽되게 나의 권애(眷愛)를 받았기 때문에 조금 교광(驕狂)한 버릇이 있다. - 『세종실록』 세종 27년(1445) 7월 10일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원칙적으로 궁에서 태어날 수 있는 아이는 왕과 세자의 핏줄뿐이었다. 그러므로 세자의 자녀를 제외한 왕의 손자는 궁궐에서 태어날 수 없다. 당시 세종의 아버지인 정안군은 세자가 아닌 왕자 신분이었으므로 왕의 손자인 세종이 사가에서 출생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왕족의 출산 때 왕실에서는 어떤 조치를 해주었을까? 공식적으로 왕실 차원의 배려는 없었다. 다만 예외적으로 임금이 아끼는 종친에게 내의원과 의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정안군에게는 그런 배려마저 없었다. 따라서 세종은 여느 사대부가와 마찬가지로 민간 의녀나 산파의 도움으로 세상에 첫울음을 터뜨린 것으로 보인다.

왕실은 많은 왕자를 필요로 했다. 아직 신생국이었던 조선에서 왕자들은 나라의 큰 자산이자 버팀목이었다. 더구나 야망과 포부가 컸던 정안군은 딸보다는 아들을 더 원했을 것이다. 비단 왕실만이 아들을 원했던 건 아니었다. 노동력이 중요했던 농본사회의 특성상 일반 백성들 또한 아들을 바랐다. 이는 당시 존재했던 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 즉 ‘여아를 남아로 바꾸는 법’이라는 용어로 설명된다. 심지어 『동의보감(東醫寶鑑)』「부인(婦人)-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에는 “임신 3개월을 ‘시태(始胎)’라고 하는데, 혈맥이 아직 흐르지 않고 형태를 본떠 변해 가는 시기이다. 아직 남녀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약을 먹거나 방술(方術)로 남아로 바꿀 수 있다.”라고 했다.

또한, 조선 초부터 의과(醫科) 시험과목으로 채택된 『부인대전양방(婦人大全良方)』에도 “임신부의 허리 왼쪽에 석웅황(石雄黃) 1냥을 비단 주머니에 넣어 두른다. 임신부의 왼쪽 팔에는 활줄 한 개를 넣은 비단 주머니를 찬다. 또는 활줄을 3개월 동안 허리에 두른다. 원추리 꽃을 차도 효과가 있다. 임신부의 자리에 몰래 수탉의 긴 꼬리털 3개를 숨겨 놓는다.”라는 방법이 등장한다.

물론 현대 한의학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그런데도 당대 의서에 이러한 방법들이 소개된 것은 남아선호사상과 도교의 사상이 맞물린 결과로, 건강한 자녀 특히 아들을 희망하는 간절한 바람이 의서에 깃든 것이다.

현실적으로 왕실이나 민간 모두 출산 후 가장 신경 쓴 것은 산후 음식이었다. 산모가 잘 먹어야 신생아가 건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산 후에는 산모의 ‘어혈 제거’, ‘면역력 증진’에 주안점을 둔 처방을 했다. 그리고 산후뿐만 아니라 임신 중에도 한약을 복용했는데 태아가 건강하게 자라고, 임신부가 입덧을 적게 하고, 출산 때 자궁이 쉽게 열리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대개 임신 중에 사용되는 약재는 당귀, 백출, 황금, 진피 등이다. 다만 인삼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용하지 않는다. 출산 후 산모는 풍(風), 냉(冷), 한(寒), 습(濕)에 취약하다. 약해진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면 근육통, 관절통, 오한, 우울증, 부종, 자궁내막증 등의 우려가 있다. 따라서 산후 보약은 체내의 불순물인 노폐물과 독소 등을 제거하고 장부의 균형과 혈액순환 촉진을 위해 천궁, 당귀, 백출, 백작약, 대복피, 자감초 등의 약재를 주로 처방한다.

· 글쓴이: 한의산업협동조합 이사장 최주리

  • 1) 여흥부흥군 민제(閔霽:1339~1408)는 태종의 비 원경왕후의 아버지로 태종의 장인이자 세종의 외할아버지이다.
  • 2) 내 아들인 밀성군(密城君)과 의창군(義昌君)은 궁밖에서 자라서 그 마음이 겸손하다. 그러나 수춘군과 익현군은 궁중에서 생장하여 편벽되게 나의 권애(眷愛)를 받았기 때문에 조금 교광(驕狂)한 버릇이 있다. - 『세종실록』 세종 27년(1445)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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