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마땅히 (상왕께서) 풍병(風病)을 앓으시어 때때로 발작하여, 부득이 세자 이도(李?)를 대리로 하여 국사를 보게 하였으며, 인장(印章)과 면복(冕服)은 감히 마음대로 전해 주지 못하고 오직 칙명이 내리기를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 『세종실록』 세종 즉위년(1418) 8월 14일
태종 재위 18년인 1418년, 연이어 긴박한 정국이 발생한다. 그해 6월 3일 태종은 큰아들인 이제(李禔)를 폐하고 양녕대군으로 봉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 이도(李?)를 세자에 세웠다. 그리고 두 달이 조금 넘은 8월 8일 전격적으로 선위(禪位)할 것을 선언한다.
폐세자와 새로운 세자 그리고 선위에 따른 새 국왕의 등극은 비단 조선만의 문제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 모든 문제에 있어서 명나라의 고명(誥命)을 받아야만 했던 조선으로서는 외교문서에 담을 내용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이유를 찾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게 논의된 명분이 바로 풍병(風病)이었다. 실제로 『태종실록』 태종 13년(1413년) 8월 11일 기록에도 나오듯 태종에게 풍병은 고질병이었다. 또 상왕으로 물러난 다음 해인 1414년 2월 풍병을 앓게 되어 대신들이 누차 온천행을 권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형인 정종으로부터 선위를 받은 후 명나라에 보내는 국서에도 “친형(親兄)인 공정왕(정종)이 아들이 없어 그 뒤를 잇게 하였는데, 뜻밖에 친형이 갑자기 풍병(風病)에 걸리어 국사(國事)를 임시로 맡기매,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리석고 용렬하여 감히 감당할 수 없어서, 두세 번 사양하였으나, 형이 이미 배신(陪臣) 이첨(李詹)을 보내어 건네므로, 부득이하여 건문(建文) 2년 11월 13일에 임시로 일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던 바 있었다.
하지만 같은 해 1월에 중국 사신이 이미 태종이 건강에 이상이 없음을 알고 갔으며, 이제야 겨우 세자 책봉에 관한 내용을 중국에 청하여 곧 사신이 올참이었다. 이에 대해 조정의 의견이 나뉘게 되었고 국서에 대해 논의를 거듭하였다. 그리고 이내 9월 13일 황제에게 보내는 국서에 풍병으로 인해 세자에게 선위하기를 청한다는 내용을 확정한다.
사실 앞서도 이야기했듯 태조를 비롯해 조선 초기 왕들에게는 대부분 풍병이 있었다. 세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세종실록』 세종 14년(1432) 9월 4일에는 “내가 근년 이후로 풍질(風疾)이 몸에 배어 있고, 중궁(中宮)도 또한 풍증(風症)을 앓게 되어, 온갖 방법으로 치료하여도 아직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처럼 자신과 중전인 소헌왕후까지 풍질을 앓자 세종은 마침내 온천행을 결정한다. 세종 22년(1440) 4월 10일의 기록을 보면 “중궁(中宮)이 일찍이 풍병을 앓았는데, 온천에 목욕한 이후로는 전의 병이 아주 나았으니 이는 목욕의 효험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소헌왕후는 목욕의 효험을 보았으며 세종 역시 세종 24년(1442) 11월 24일 세 차례 온천에도 병이 거의 조금 나았으나 그래도 영구히 낫지는 않았다는 말을 한 것을 보아 나름 효험을 본 듯하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병조판서를 지낸 조말생, 판한성부사 허주, 개성부 유수 권맹손, 중추원사 윤번, 예문 대제학 윤회 등 많은 신하가 풍병으로 사직을 청하거나 졸하였다.
여러 의서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풍병(風病)은 그 근본에 열이 있으며, 증상은 피부염증, 소양증, 관절통, 근육통, 마비, 저림 등으로 나타나고, 심하게는 중풍으로 발현된다.
여러 의원의 풍병에 대한 견해가 분분하니, “혹 열 때문이오, 혹 기 때문이요, 혹 담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하간(河間)은, “풍병은 대부분 열이 성해서 생긴다.”고 하였다. 동원(東垣)은, “풍병은 밖에서 온 풍사(風邪)로 인한 것이 아니고 본래 기병(氣病)이다.”라고 하였다. 단계(丹溪)는, “풍병은 서북지방에서는 기후가 추워서 풍사에 적중되는 사람이 실제로 있지만, 동남지방에서는 기후가 따뜻하고 땅에 습기가 많기에 풍병이 생긴 경우는 모두 습(濕)이 담을 생기게 하고, 담이 열을 생기게 하며, 열이 풍을 생기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이규준, 『의감중마(醫鑑重磨)』 「백병총괄(百病總括)」
『동의보감』에는 두풍(頭風), 독풍(毒風), 자풍(刺風), 간풍(癎風) 등 총 42개의 풍병이 나온다. 『의감중마』의 기록처럼 풍병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그 원인과 증상에 따라 풍병은 내풍(內風)과 외풍(外風)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내풍은 인체 균형이 깨져서 자율신경과 내분비 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몸의 이상증세를 말한다. 『동의보감』에는 “살찐 사람에게 중풍이 많다는 것은 살이 찌면 주리가 치밀하여 기혈이 막힐 때가 많아서 잘 통하기 어려우므로 대부분 갑자기 쓰러지게 된다는 것이다.”고 하였고, “사람이 50살이 지나 기가 쇠할 무렵에 이러한 병이 많이 생긴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러한 경우를 말함이다. 즉 음혈(陰血)이 허손(虛損)되어오는 비정상적인 열로 인해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쓰러지고, 경련이 일거나 눈과 입이 뒤틀리는 구안와사가 오고, 반신불수가 되기도 한다. 바깥의 바람을 맞아 생기는 외풍의 경우 발열이나 삭신의 통증, 피부 발진, 혀가 굳는 현상 등이 나타난다.
풍병은 탕약, 뜸, 침 등 다양한 치료법이 있다. 『동의보감』에는 여러 탕약을 처방함은 물론 “중풍은 모두 맥도와 혈기가 막혀서 생긴 것이다. 뜸을 뜨면 맥도가 뚫리고 혈기가 통하여 완전히 낫는다.” “말을 할 수 없을 때는 아문(?門), 인중(人中), 천돌(天突), 용천(涌泉), 신문(神門), 지구(支溝), 풍부(風府)에 자침한다.”와 같은 많은 침구법이 나온다. 그리고 이와 함께 음식을 통한 치료도 병행했다. 음식으로 열을 내리고 풍사(風邪)를 없애고, 허한 기를 보강하고, 기의 순환을 촉진시키는 방법이다.
전순의의 『식료찬요』에는 풍병에 대한 식치가 잘 소개되어 있다. 그 일부를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갑자기 중풍에 걸려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치료하려면 대두(大豆:큰 콩)를 삶은 다음 그 즙을 엿같이 달여먹거나 혹은 진하게 삶아 먹는다.
중풍에 걸려 얼굴이 부은 것을 치료하려면 파를 잘게 잘라 달여먹거나 국이나 죽을 만들어 먹는다.
풍기(風氣)가 있으면 여어(?魚:가물치)를 회를 떠서 먹는다.
중풍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증상을 치료하려면 부추를 갈아 즙을 내어 복용한다.
검은 참깨(흑지마)를 볶아서 먹으면 풍질(風疾)이 생기지 않고, 풍(풍)을 앓던 사람이 매일 먹으면 보행하는 것이 단정하고 말이 어눌하지 않게 된다.
풍병으로 인한 습비(濕痺:저린 증상)로 오완육급(五緩六急)을 치료하려면 오골계 1마리를 평소대로 손질하여 잘 요리한 다음 국으로 만들어 먹는다.
『식료찬요』에 풍병의 식치로 등장하는 음식에 많이 사용되는 재료는 대두, 산초, 파, 검은 참깨, 흰 참깨 기름, 솔잎 등 식물성 16종과 오골계, 고깃국 등 동물성 4종이며, 큰 콩즙, 의이인죽(薏苡仁粥:율무죽), 동마자죽(冬麻子粥:삼씨죽), 갈분작색병(葛粉作索餠:칡가루로 만든 떡), 부추즙, 오골계국, 우엉 분말로 만든 수제비 등이 있다. 이 중 동마자와 흰쌀 등은 공복에 복용하고, 흰 참깨의 경우 “식후에 날로 1홉씩 먹는데 종신토록 끊이지 않도록 한다.”고 하였다.
오골계의 경우 『동의보감』에서도 “중풍으로 말이 어눌한 것과 풍한습비(風寒濕痺)를 치료한다. 오계(烏鷄)고기는 국을 끓이는데, 파, 천초, 생강, 소금, 기름, 간장을 넣고 푹 삶아서 먹는다.”고 하였다. 『식의심감(食醫心鑑)』에서도 풍병을 음식으로 치료하는 여러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대개 큰 콩즙, 의이인죽, 동마자죽, 갈분작색병 등 『식료찬요』와 비슷하며 나귀머리찜(蒸驢頭方), 양머리고기찜(羊頭肉方), 삶은 곰고기(熊肉??方), 사슴발굽찜(?鹿蹄方)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식치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의 풍병은 대개 음혈(陰血)의 허손(虛損)으로 인해 생겼지만, 현대의 풍병은 스트레스나 잘못된 섭생으로 인한 체내 잉여 열로 생긴 원인이 많으니 그와는 사뭇 다르다. 따라서 오늘날의 풍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열을 다스리는 식치를 발굴하여 개인별 맞춤으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할 시점이다.
풍병을 얻어 갑자기 말을 못 하게 되었구나. (風邪遽失音)
처량한 것은 이미 지나간 인간사요 (凄?人事舊)
삭막한 것은 지금 세상 인정이로다. (索寞世情今)
넋은 머나먼 남쪽 바다에서 부르고 (復魄南溟遠)
영혼은 북두성 깊은 곳으로 돌아가니 (歸魂北斗深)
해 저물어 가는 이때 슬픔을 어찌 견디랴. (那堪歲云暮)
함박눈 속에 가는 명정 펄펄 나부끼어라. (飛?雪沈沈)
- 이이명(李?命:1658~1722) 『소재집(疏齋集)』「군수만사(郡守挽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