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

<7> 원경왕후의
노산(老産)과 난산(難産)

중궁(中宮)이 해산을 하였는데, 임금이 김여지(金汝知)에게 일렀었다.
“중궁(中宮)이 매양 난산(難産)하는 병이 있어서 내가 걱정하였더니, 이제 경 등이 성의 있게 약을 공급함에 힘입어서 근심이 없으니, 내가 심히 기뻐한다.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 양홍달(楊弘達), 검교참의(檢校參議) 양홍적(楊弘迪), 전 판전의감사(判典醫監事) 조청(曹聽) 등이 지은 약이 효험이 있었으니, 각각 쌀 10석을 내려 주고, 전의 주부(典醫注簿) 김토(金土), 부사직(副司直) 이헌(李軒)에게 쌀 각각 5석을 내려 주라.”
유양과 이관은 감제(監劑)하는 데 공이 있었던 까닭으로 이러한 하사(下賜)가 있었다.

- 『태종실록』 태종 12년(1412) 6월 23일

세종의 어머니인 원경왕후(元敬王后)는 몇 명의 왕자를 나았을까.

왕실족보인 『선원록』이나 『선원보략』에는 원경왕후 소생으로 4남 4녀가 기록돼 있다.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세종), 성녕대군,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정선공주다. 그런데 태종 12년(1412) 6월 23일에 원경왕후가 또 한 명의 왕자를 출산한 기록이 보인다. 정선공주를 낳은 지 8년, 성녕대군을 출산한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 원경왕후는 48세였다. 지금으로 봐도 지극히 노산이었다. 특히, 원경왕후는 출산 시 난산(難産)을 했었다.

태종은 원경왕후가 왕자를 낳자 크게 기뻐하며 관계자들을 포상하였다. 또 늦게 얻은 왕자가 무사히 커갈 수 있도록 다른 사람에게 양육을 맡긴다. 그날 같은 기록에 따르면 복자(卜者:점쟁이)가 아이의 목숨이 길지 못하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태종과 원경왕후는 자식이 없으면서도 잘 키워줄 사람으로 태조의 후궁인 성빈 원씨를 택했다. 태종은 성빈 원씨를 마음의 어머니로 예우했었다. 태종은 태조의 정비였던 신덕왕후(神德王后)는 오히려 아버지의 첩으로 보았고 성빈 원씨는 아버지와 결혼한 계비(繼妃)로 여겨 계모(繼母)로 생각했다. 하지만 성빈 원씨에게 간 왕자는 왕실족보에 오르지 못했다. 점쟁이의 예언처럼 유아기에 숨진 탓으로 볼 수 있다.

태종의 말을 통해 원경왕후가 매양 모든 자녀를 힘들게 출산했음을 알 수 있다. 태종은 이를 난산지병(難産之病)이라고 말했다. 원경왕후는 아들 셋을 사산(死産) 또는 출산 직후 잃는 아픔을 겪었다. 큰아들인 양녕대군은 아들의 출생 순서로는 네 번째였다. 원경왕후의 출산이 힘들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를 통해 아마도 세종 역시 어렵게 얻은 아들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전통시대에도 노산(老産)과 난산(難産)이 겹치면 산모와 아기 모두 위험했다. 사실 현대에도 35세 이상의 임신은 고위험군에 속한다. 임신 합병증을 비롯하여 임신 중 고혈압증, 조산, 난산, 산후출혈, 전치태반, 기형아의 위험성이 커진다. 특히, 40세 이상은 20대와 비교하여 유산, 사산, 기형 위험률이 상당히 증가한다. 산모의 신체가 노화될수록 염색체 돌연변이 가능성도 커진다. 또 난산 역시 분만 시간 지연으로 모체와 태아에 장애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다행히 의학이 발달한 현대는 노산이나 난산도 철저한 산전관리와 충분한 영양섭취, 적당한 운동, 적절한 조치로 안전한 출산이 가능하다.

하지만 난산에 노산이 겹친 원경왕후의 출산이었기에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반적으로 난산의 원인은 골산도 이상, 만출력 미흡, 태아나 태반 위치 이상, 산모의 질환 등이다. 원경왕후의 고질적인 난산은 처방 약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질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지속적인 난산임을 볼 때, 골반의 이상, 만출력 약화, 임신 중 고혈압증 등도 생각할 수 있다.

인시에 중전(中殿)이 사태(死胎)를 낳았다. 간밤부터 옥후(玉候)에 난산(難産)할 걱정이 있으므로 마침내 최생단(催生丹)과 다른 방문의 약을 썼다. 그 결과 인시에 비로소 공주를 낳았는데 사태였다.

- 『선조실록』 선조 37년(1604) 11월 17일

왕실에서는 난산에 최생단(催生丹), 달생산(達生散) 등을 처방했다. 1604년 인목왕후가 전날 밤부터 진통으로 힘들어했는데 난산(難産)의 기미가 있자 어의들은 최생단과 다른 방문의 약을 썼다고 한다. 그 결과 다음 날 공주를 낳았으나 그만 죽은 채로 출산 되었다.

『본초강목』이나 『동의보감』에서는 난산의 예방과 처방으로 달생산을 쓴다고 하였다. 달생산은 자궁의 기혈순환을 좋게 하여 자궁문을 잘 열리게 하고 진통시간을 크게 줄여 순산을 돕는다. 『승정원일기』 현종 즉위년(1659) 10월 20일에 따르면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가 명선공주(明善公主)를 출산하기 전 달생산(達生散)을 처방하여 올렸다고 한다. 이밖에도 숙종 3년(1677) 4월 19일에도 숙종 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에게 달생산을 하루 간격으로 올리겠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이후에도 혜경궁 홍씨, 정조 비인 효의왕후(孝懿王后), 순조 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임신하였을 때도 모두 달생산을 처방해 올렸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 후기 왕실 여인이 많이 복용한 달생산은 『동의보감』에 따르면 대복피(술로 씻은 것) 2돈, 감초(구운 것) 1.5돈, 당귀, 백출, 백작약 각 1돈, 인삼, 진피, 자소엽, 지각, 사인(간 것) 각 5푼을 썰어 1첩으로 하여 푸른 파잎 5장을 넣고 물에 달여서 만든다고 하였다.

또 『승정원일기』 현종 즉위년(1659) 11월 5일에 달생산 복용을 중지하고 불수산(佛手散)에 익모초(益母草)를 추가하여 올렸다고 하는데 『동의보감』에도 “임신부가 산달에 불수산을 먹으면 태가 작아져 쉽게 아이를 낳을 수 있으니 저절로 난산의 우려가 없게 된다.”라고 하였고, 익모초 또한 혈을 잘 흐르게 하고 기르기에 산전이나 산후에 쓰이며 난산에 가장 좋은 약이라고 하였다.

이밖에도 태를 작게 해 쉽게 아이를 낳도록 돕는 약으로는 신침원(神寢元)과 축태환(縮胎丸), 속태환(束胎丸)이 쓰였고, 난산과 역산을 치료하고 아기를 빨리 나오게 하는 삼퇴산(三退散), 신응흑산(神應黑散), 삼퇴육일산(三退六一散), 신험산(神驗散), 여신단(如神丹) 등이 처방되었다.

처음에 숙의(淑儀) 나씨가 난산(難産)이 되어 병이 위급하니, 궁중(宮中)이 떠들썩하면서 숨졌다는 말이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밖에 나가도록 명하였으며, 나가서 해산(解産)하니 아이는 생기(生氣)가 있었으나 조금 있다가 숨이 끊어지니 그때 사람들이 슬퍼하고 상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미 해산할 수가 있었다면 생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니, 처음에 내보내지 않았더라면 모자(母子)가 혹시 보전(保全)될 수가 있었는데 강박해서 밖으로 내보내어 이런 사고가 있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궁중에 사설(邪說)과 구기(拘忌)가 있어서 임금도 미혹(迷惑)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중종실록』 21권, 중종 9년(1515)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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