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실록』 세종 2년(1420) 7월 10일
1420년 7월 10일 낮 오시(午時:11~1시)에 원경왕후가 56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세종은 어머니가 위독하자 며칠 동안 곡기를 끊은 채 간호에 매진하였으나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만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세종은 자신의 심신을 돌보지도 못한 채 곧장 고례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풀고, 발을 벗고 거적에 나아가 울부짖으며 통곡한다. 이에 상왕인 태종은 그런 아들의 건강을 염려해 미음 들기를 권유한다. 그러나 세종은 끝내 이를 들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태종은 다음 날에도 환관 김중귀(金重貴)를 보내어 미음을 권하였다고 한다.
미음은 건강을 찾고 유지하기 위한 식치(食治) 음식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식치의 개념은 오래전부터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617~686) 쓴 『금광명경』「제병품」의 주석에 이르길 “사시와 음식을 거스르면 병이 생긴다.”라며 음식과 건강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 『고려사』에는 왕의 반찬을 공급하는 일을 담당하는 상식국(尙食局) 또는 사선서(司膳署)에 식의(食醫)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에 이르러 전순의는 『식료찬요』 서문에서 “식품으로 치료되지 않으면 약을 쓴다. 치료는 당연히 오곡(五穀), 오육(五肉), 오과(五果), 오채(五菜)로 해야 한다. 어찌 마른풀과 죽은 나무뿌리에 연연할 수 있겠는가”라며 음식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성종 때의 심의(沈義:1475~?)는 『대관재난고(大觀齋亂稿)』에서 음식을 절제할 것을 강조하며 의약보다는 식치가 먼저 임을 피력했다.
여러 기록을 통해 등장한 조선왕실의 대표적인 식치(食治)는 죽, 미음, 떡, 면, 탕, 즙, 차 등이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죽과 미음이다. 질병이나 슬픔으로 식사를 제대로 못 할 시 위장의 기능이 떨어지는데 이때 죽이나 미음은 훌륭한 보양식이나 치료식이 된다. 특히 미음은 소화가 잘 되어 국상을 치르는 왕에게 수시로 올려졌다. 어머니를 여윈 슬픔에 수라를 들지 못하는 세종에게 태종이 미음을 권해 기력을 회복하게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세종은 태종이 승하할 때도 병환이 위중할 때부터 승하한 이후에도 아무것도 먹지 않자 대신들이 간곡히 청하여 승하 다음 날에 겨우 담죽(淡粥)을 조금 들었다고 한다. 담죽(淡粥)은 율무, 마, 쌀로 끓인 묽은 죽으로 오늘날의 미음이다.
이러한 상사(喪事)를 연이어 겪은 이후 세종은 후대의 왕이나 왕자가 상례로 몸이 쇠약해지는 것도 우려했다. 슬픔에 깊어 전례에 따라 쓰러지기 직전까지 음식을 먹지 않을까 봐 걱정한 것이다. 이에 세종은 소헌왕후가 승하한 이후 왕자들의 음식 섭취에 대한 절차를 마련한다. 『세종실록』 세종 28년(1446) 3월 24일 기록에 따르면 “임금이 왕세자와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에게 명하여 첫날부터 2일까지는 담죽(淡粥)을 마시게 하고, 3일부터 4일까지는 죽(粥)을 먹게 하고, 5일만에야 비로소 밥을 먹게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의 군주 중 대표적인 효자였던 인종은 부왕인 중종이 승하하자 곡기를 끊고 미음조차 먹지 않았다. 『인종실록』 「묘지문」에 따르면 “(중종이) 훙서(薨逝)하시게 되어서는 미음까지 전연 드시지 않은 것이 엿새이고 울음소리를 그치지 않으신 것이 다섯 달이었으며 죽만을 마시고 염장(鹽醬)을 드시지 않았다.”라고 한다. 이에 대신들은 임금의 한 몸은 종사와 신민의 주인이 된 것이니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한 것으로 억지로라도 권제(權制)를 따르시어 고깃국을 조금이라도 들고 자미(滋味)를 돋우라 하며 세종대왕의 유교(遺敎)를 써서 올린다. 그러나 인종은 세종의 유교는 병이 있는 경우에 그렇게 하라고 가리키신 것이므로 건강한 나의 경우와는 같지 않다며 이를 거절한다. (『인종실록』 인종 1년(1545) 1월 25일) 하지만 겉보기에도 수척해졌을 뿐만 아니라 걸음 또한 휘청거릴 만큼 쇠약해진 인종은 결국 재위 9개월 만에 승하하고 만다. 이때 인종의 나이 겨우 30세였다.
쇠약한 사람에게 아주 좋은 미음은 쌀이 주재료다. 멥쌀이 일반적인 가운데 찹쌀, 메밀, 콩, 소맥, 율무, 인삼, 홍합 등 다양하게 응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왕실 관련 기록에는 미음의 종류로 진미음(陳米飮), 인삼속미음(人蔘粟米飮), 목미음(木米飮), 갱미음(粳米飮), 청량미음(靑梁米飮), 청미음(淸米飮), 직미음(稷米飮), 속미음(粟米飮) 등 다양하게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숙종과 경종 조에는 특히 인삼속미음을 올렸다는 기록이 많이 보이고, 영조는 쌀에다 도라지를 넣은 길경미음(桔梗米飮)을 찾았다.
미음의 효능은 무엇보다 원기회복에 좋다는 것이다. 즉 빠르게 기력을 회복시키는 음식으로 오랜 질환이나 급성 감기, 탈진, 탈수 등 각종 병으로 인해 허약한 몸에 좋다. 특히 소화력을 생각했을 때 오래 끓이는 게 좋은데 쌀 외의 재료에 따라 약효는 다르다.
소맥(小麥)은 맛은 달고, 성질은 약간 차고, 독이 없다. 소음경과 태양경으로 들어간다. 열을 멎게 하며, 번갈로 목구멍이 마르는 것을 멎게 한다. 소변이 잘 나오게 하고, 간기(肝氣)를 기르며, 누혈이나 타혈을 멎게 한다. 부인이 쉽게 잉태하게 한다. 심기를 기르므로 심병에 먹어야 한다. ...(중략)...소갈로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있을 시 소맥으로 밥이나 죽을 만들어 먹는다. ...(하략)...
- 이시진, 『본초강목』「곡(穀)-마맥도류(麻麥稻類)」
『본초강목』에선 위 기록처럼 소갈로 인해 가슴이 답답한 증세가 있을 때 소맥으로 만든 밥이나 죽을 처방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향약집성방』에서는 “열을 없애고, 마른 갈증과 목이 마름을 그치게 하고, 소변을 잘 나오게 하며, 간의 기능을 보양하고, 하혈과 타혈을 그치게 한다.”고 소맥의 효능을 설명하고 있고, 물 1말에 지골피와 소맥을 넣고 달여서 물이 7되가 되면 갱미를 넣고 미음을 쑤어 소갈로 인해 갈증이 날 때마다 조금씩 복용하면 잘 낫는다고 하였다. 또 『의림촬요』에서도 소갈의 식치(食治)로 소맥으로 지은 밥이나 죽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세종의 어의였던 전순의가 지은 『식료찬요』에서도 소맥은 소갈로 입이 마르는 것을 치료하려면 소맥으로 밥이나 죽을 만들어 먹는다고 하였기에 당뇨로 고생했던 세종 역시 소맥 미음을 먹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임금이 말하기를,
“날씨가 이같이 더운데, 군병(軍兵)이나 여사군(轝士軍)에게 미음(米飮)을 먹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신여군:神轝軍)과 대가호군(大駕扈軍)들과 함께 모두 그늘져 서늘한 곳에 머물면서 기다리게 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33년(1757) 7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