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실록』 세종 2년(1420) 4월 26일
유교의 대원칙인 삼강오륜 중 한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그만큼 나이 많은 사람들에 대한 대우가 남다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교적 이념을 근본으로 삼고 있는 조선에선 더욱 노인을 대우하였다. 특히 107세 노인에게 특별한 은전을 베푼 세종은 경로우대를 국가의 제도로 만들었다. 즉, 나이 든 사람을 존중할 때 비로소 건전한 사회 기풍이 만들어질 수 있음을 생각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예조(禮曹)에 명하기를,
“노인을 존경하는 예의는 마땅히 행할 바이니, 무릇 백성으로서 나이가 80세 이상인 자에게는 백신(白身)이면 종8품을 주고, 원직(元職)이 9품인 자에게는 정8품을...(중략)... 모두 3품까지로 한정한다. 부인의 봉작(封爵)도 이에 준한다. 천인(賤人)으로서 80세 이상인 자는 백신(白身)은 정9품을 주고...(중략)...백 세 이상인 자는 백신(白身)과 8품 이하는 종6품을 주고, 7품 이상인 자는 두 자급(資級)을 올려 주되, 모두 5품까지로 한정하고, 여자도 또한 봉작(封爵)하기를 같게 하고 그 몸을 면천(免賤)시킬 것을 허락한다. 중외(中外)에 이문(移文)하여 성명을 초록(抄錄)해서 아뢰라.”
- 『세종실록』 세종 29년(1447) 9월 6일
『세종실록』에 따르면 평민의 경우 80세 이상 노인에게는 종8품의 벼슬을 주고, 옷감과 쌀 등을 하사하였다. 이는 비록 천민이나 여자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천민의 경우 쌀을 하사하고, 80세 이상이 되면 종9품을, 백세가 되면 면천(免賤:천한 신분에서 벗어나 평민이 되게 함)까지 시켜주었다.
그리고 이따금 80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양로연(養老宴)을 열어 그들을 대접하였다. 양로연 역시 계급과 상관없이 양반, 평민, 여자, 천민 모두가 참석하였다. 물론 여자들과 천민을 참석시키는 것에 대해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종 14년(1432)엔 처음 양로연이 열렸는데 8월 14일 대신들은 부녀로서 연로한 자는 거동하기가 힘들어 대궐 출입은 어려울 것 같다는 명분을 들어 술과 고기만을 내릴 것을 청한다. 그러자 세종은 가마를 타고 자리에 들어오게 하고, 여종으로 하여 곁에서 부축하여서라도 모시고 오라고 명한다. 8월 17일 그런데 이번엔 승정원에서 천민은 양로연에 나오지 말게 할 것을 청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세종은 “양로(養老)하는 까닭은 그 늙은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그 높고 낮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니, 비록 천한 사람이라도 모두 들어와서 즐기게 하라.”라고 하여 그들을 모두 참석시킨다.
세종은 양로연에 참석하는 노인들에게 최대한의 존경을 표했다. 비록 임금이라 할지라도 노인들이 들어와 섬돌에 오를 때는 일어나 그들을 맞았고, 자신에게 절도 하지 말라 일렀다. 물론 음식과 술을 넉넉히 제공해 마음껏 마시고 즐기게 하였으니 잔치가 무르익자 어떤 이는 시를 지어 바치고, 또 어떤 이는 일어나 춤을 추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종 22년(1440) 8월 11일, 세종은 양로연을 영구히 시행하고 폐하지 말 것을 명하여 이를 국가의 정책으로 확립한다.
이렇듯 노인을 배려하고 우대하였던 만큼 세종의 시대엔 고령자가 많았다. 세종 17년(1435) 90세 이상의 노인을 조사한 결과,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함길도, 황해도 등 614명이 살고 있으며 그들 중 100세 이상은 남자가 3명 여자가 7명으로 파악되었다. 당시 경기도, 평안도, 충청도, 개성 일대 등은 조사하지 못했으므로 전국에 걸쳐 100세 이상 노인은 20여명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각 도의 인구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당시의 인구가 총 702,879명으로 파악되었다. 그런데 이때의 인구는 전체 인구수가 아니라 정인(丁人) 즉, 역을 지는 남자의 수라는 사실과 통계가 불확실하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세종 사후 약 15년 후인 세조 12년(1466) 11월 2일 대사헌인 양성지(梁誠之)는 시무책을 올리며 “우리나라의 인민(人民)은 무려 1백만 호(戶)나 된다.”라고 하였는데 일반적으로 당시 한 호(戶)는 4~6명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세종 시대의 인구는 약 400만명~600만명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생각해 보면 인구 약 20만명~30만명 당 1명이 100세 이상이었음을 뜻한다.
세종 때 이렇듯 노인이 많은 이유에 대해 사회적 우대뿐만 아니라 보건위생 정책이 좋아졌다는 점도 들 수 있다.
각도의 감사에게 명하기를,
“옥(獄)은 죄 있는 사람을 가두는 것이다. 그러나, 덮어주고 보호하지 않으면 혹 횡액으로 병에 걸리어 일찍 죽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호(庇護)하는 조건이 『육전(六典)』에 실려 있고, 또 여러 번 전지(傳旨)를 내리어 절목(節目)이 세밀하나, 관리가 혹 유의하지 않아서 받들어 행하는 것이 철저하지 못하여, 죄수들이 질병에 걸리어 생명을 잃게 되니, 참으로 염려된다.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몸 받아서 각 해에 반포하여 내린 조장(條章)을 받들어 행하는가 않는가를 엄하게 검사하고 추궁하여, 폐지하고 해이하지 말게 하라. (그리고) 마땅히 행할 조건을 또 뒤에 기록한다.”
1. 매년 4월부터 8월까지는 새로 냉수를 길어다가 자주자주 옥 가운데에 바꾸어 놓을 것.
1. 5월에서 7월 10일까지는 한 차례 자원에 따라 몸을 씻게 할 것.
1. 매월 한 차례 자원에 따라 머리를 감게 할 것.
1. 10월부터 정월까지는 옥 안에 짚을 두껍게 깔 것.
1. 목욕할 때에는 관리와 옥졸(獄卒)이 친히 스스로 검찰하여 도망하는 것을 막을 것.
- 『세종실록』 세종 30년(1448) 8월 25일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 세종의 의지였다. 세종은 비록 감옥에 있는 죄수들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하여 죽는 일을 방지하고자 늘 수리하고, 청소하고, 정결하게 하며 질병 있는 자들에게 약을 주어 치료하고 옷과 먹을 것을 주어 구호하게 할 것을 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깨끗한 물을 주고, 때에 따라 목욕과 머리를 감게 하고 짚을 두껍게 깔아 추위에 얼어 죽지 않도록 하는 조치들을 취하였다.
한편, 세종은 『의방유취』, 『향약구급방』과 같은 의서들을 만들어 각 지방에 내려보냈다. 『세종실록』 세종 16년(1434) 6월 5일 기록에서 이러한 정황을 찾아볼 수 있는데 세종은 당시 유행병이나 감염병 등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의서를 베껴 내려보내어 한성부와 각 지방의 집집마다 주지(周知)시키도록 하며 정성을 다하여 구료하면 사망에 이르지는 아니할 것이니, 나의 긍휼(矜恤)하는 뜻에 맞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유행성 질병과 열독(熱毒)은 서로 감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니 ...(중략)...한때 돌아가는 여역(癘疫)에는 항상 매달 보름날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 가지를 잘게 썰어 넣고 물을 끓여 목욕한다. 경험양방(經驗良方)으로 상한역려(傷寒疫癘)에 한 자리에 거처하여도 서로 감염되지 않는 방법은 매일 이른 아침에 세수하고 참기름을 코안에 바르고, 누울 때도 바른다. 창졸간이라 약이 없으면, 곧 종이 심지를 말아서 콧구멍에 넣어 재채기를 하는 것이 좋다.”라고 하여 구체적인 방안까지 내려보낸다.
이렇듯 세종이 백성들의 건강에 대해 유독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는 오직 하나 ‘비록 천민이나 하늘이 낸 백성이다.’라고 했던 그 말처럼 백성 모두를 하늘처럼 귀하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지팡이에 흰 머리 노인들 모두 모이어라. (鶴髮鳩筇簇後前)
해동(조선) 낙남 연회에 화목함이 넘치는구나 (海東和氣洛南筵)
바라건대, 노인들 백 세의 장수를 가지고 (願將羣老期頤壽)
우리 어머니도 만만년 살도록 절을 바쳐 주오. (拜獻慈宮萬萬年)
-정조, 『홍재전서(弘齋全書) 제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