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조선시대 자자(刺字)와 현대의 문신
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 『세종실록』 세종 11년(1426) 7월 30일
1426년 7월 30일 이날 절도범에 대한 처벌을 두고 어전회의가 열린다. 우대언(우승지) 정연이 어린이와 노인이 물건을 훔쳤을 때의 처벌을 문의한 것이다. 이에 세종은 노인과 어린이의 자자(刺字)형은 마땅하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형조 참판 유계문(柳季聞)은 자자(刺字)는 죄를 표기(表記)하는 것이니, 비록 노인과 어린아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판부사 허조(許稠)는 노인과 어린이는 장형(杖刑)도 면하여 대신 속전(贖錢:벌금)을 내게 하는데 하물며 태형이나 장형보다 고통이 심한 자자(刺字)를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한다.
세종은 법률의 계도적 성격과 함께 인정(人情)을 생각했다. 어린이에게는 교화될 수 있는 시간이 있음을 보았고, 노인은 삶을 영위할 시간이 얼마 없음을 고려한 것이다. 그리하여 임금은 형조에 “70세 이상 노인과 15세 이하의 어린이에게는 자자(刺字)를 금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묵형(墨刑)이라고 불리었던 자자(刺字)는 죄인의 얼굴이나 팔뚝의 살갗에 상처를 내 먹물로 죄명을 찍어 넣는 일이다. 글자는 범죄 내용에 따라 ‘도살우(盜殺牛)’ ‘도관전(盜官錢)’ ‘창탈(槍奪)’ ‘절도(竊盜)’ ‘강도(强盜)’ ‘강와(强窩)’ 등 두 글자나 세 글자를 찍어 넣었다. 그러나 때로는 글자가 늘기도 하였다. 세종 12년(1430) 8월 25일 세종의 어대(御帶)에 사용된 금을 도용한 상의원(尙衣院)의 장인(匠人) 김준(金俊)과 박충(朴忠)에게는 ‘도내부재물(盜內府財物)’라는 다섯 글자를 새기는 형벌이 가해졌다.
조선은 『대명률』을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 규정에 따라 강도범과 절도범에게 이 형을 집행하였는데 글자마다 각기 방(方)이 1촌 5푼이고 매획(每劃)의 넓이는 1푼 5리로서, 위로는 팔꿈치를 지나지 않고, 아래로는 팔목을 지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조선 최초의 법전이었던 『경제육전(經濟六典)』 속형전(續刑典)에는 “절도(竊盜)로서 사유(赦宥) 후에 다시 범죄 한 자는 옛 제도에 의해서 왼쪽 팔뚝 뒤와 목 위에 자자(刺字)한다”고 규정하였다. 이처럼 조선 초에는 자자의 부위를 팔뚝으로 규정했으나 이를 소매로 가려 감추거나 없애버리는 등의 일이 벌어지자 세종 25년(1443) 2월 5일 절도죄를 세 번 저지른 자는 ‘절도(竊盜)’라는 두 글자를 양쪽 뺨에 갈라 자자하고 인하여 관노(官奴)에 소속시키는 안을 확정하여 실행했다.
자자형 중 얼굴에 죄명을 새기는 형벌을 경면(黥面)이라 하였는데, 연산군 시대 이는 노비에게로 확대 시행되었다. 『연산군일기』 연산 12년(1506) 5월 7일에는 “도망치는 노비는 공·사·천(公私賤)을 불문하고, 남자는 왼쪽 뺨에 ‘도노(逃奴)’ 두 자를 자자하고, 여자는 오른쪽 뺨에 ‘도비(逃婢)’ 두 자를 자자하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실, 경면형은 이미 고려 시대 때부터 행해진 형벌로 『고려사』 형법(刑法志)에 따르면 “도둑질을 범하고 (유배되었는데) 유배된 곳에서 도망친 자는 형(刑)을 집행하고 얼굴에 문신을 새겨(鈒面) 멀리 떨어진 육지의 주현(州縣)으로 유배 보낸다.”고 하였다. 더하여 같은 책 「김부식 열전」에 따르면 묘청의 난이 진압된 후 그 잔당 중, 사납게 저항한 자들은 서경역적(西京逆賊)이라는 네 글자를 얼굴에 새겨 해도(海島)로 유배 보냈고, 그 다음가는 사람은 서경(西京)이라는 두 글자를 역시 얼굴에 새겨 향(鄕)과 부곡(部曲)으로 나누어 유배 보냈다고 한다.
이처럼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경면(黥面)은 가혹한 형벌이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문제가 제기되었고 그 시행이 점점 줄어들다가 18세기에 이르면 법조문에서 사라진다.
“근래에도 경법(黥法)이 있는가? 일찍이 장문(狀文)을 보니 자자(刺字)한다는 말이 있었다.”
하니,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오로지 『명률(明律)』을 쓰는데 『명률』에 자자한다는 글이 있으므로 경외(京外)에서 조율(照律)에만 그 글을 인용할 뿐이고, 실로 자자하는 일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그 법이 없는데 글에만 쓰는 것은 뜻이 아주 없고, 후세에서 또한 글에 따라 실용하는 폐단이 없을는지 어찌 알겠는가? 이 뒤로는 장문일지라도 이런 문자를 영구히 없애라는 뜻을 엄히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 『영조실록』 영조 16년(1740) 4월 17일
『영조실록』에는 이와 같은 정황이 잘 기록되어 있다. 영조 때 법전인 『속대전(續大典)』을 수찬(修撰)하는 과정에서 임금과 우의정 유척기(兪拓基) 간의 대화를 통해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이미 자자(刺字)를 시행하는 일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에 영조는 사문화된 법률을 굳이 법전에 써놓을 필요가 없다고 하며 영구히 없애라고 명한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26년(1444) 1월 21일에 따르면 자자는 바늘 10여 개를 묶어 살점에 상처를 낸 후 먹물을 칠하고 베로써 그 자자한 곳을 싸매고 봉한 후에 씻거나 빨아내지 못하도록 하고 먹의 흔적이 깊이 박힌 후에 놓아주었다고 한다. 참고로 『향약집성방』에는 자자(刺字)를 치료하는 방법이 나와 있는데 “붉은 흙을 곱게 갈아 먼저 물건으로 글자 위를 찔러 터트린 다음 수(酥:연유)에 개어 바른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피부는 바깥으로부터 표피, 진피, 피하조직으로 구성된다. 자자는 표피, 진피, 피하조직 모두에 상처를 내어 새겼다. 표피에만 먹물을 입히면 글씨는 한 달이 지나면 흐려지고 마는데 이는 진피층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세포는 각질층까지 올라와 죽은 세포가 되어 떨어져 나가는 과정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턴오버(turn over)는 약 28일이 주기이다. 하지만 진피 세포는 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자자형은 진피 또는 피하지방까지 상처를 내는 방법으로 시행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를 남긴 것이다.
특히 자자형은 전문 의료인이 시행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의 단정하고 깔끔한 문신과는 달리 먹물이 피부 주위로 많이 퍼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얇은 진피층을 통과하면 피하층은 느슨한 조직으로 이곳에 주입된 먹물은 한 곳에 있지 않고 주변으로 확산한다. 형벌인 자자는 지금의 문신과는 달리 관리되지 않은 흉터에 불과한 셈이다.
흉터는 모양에 따라 색소 침착형, 울퉁불퉁 튀어나온 유형, 함몰형, 켈로이드형1) 등으로 나뉜다. 한의학적으로는 흉터는 대부분 침 요법으로 치료한다. 흉터 밑바닥에 생긴 강한 결합조직을 끊어주면서 그 사이에서 생기는 새살들을 고르게 펴는 방법이다. 다만 피부 재생까지는 여러 차례 시술이 필요하며, 도침요법과 사혈요법도 도움이 된다. 또한 흉터를 남기지 않는 화상 상처의 회복에는 자운고와 산침(散鍼)이 탁월하다.
한편, 『승정원일기』에는 상처가 발전해 흉터가 남지 않도록 조치했던 처방이 남아 있다.
약방 도제조 신흠(申欽)과 제조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삼가 의녀(醫女)가 전하는 말을 들으니, ‘전하께서 왼손 새끼손가락이 손톱을 깎다가 다쳐서 대지증(代指證)으로 변하였으니, 반드시 서둘러 통증을 그치게 하고 새살이 돋도록 해야 합니다. 황납고(黃蠟膏)에 매핵인(梅核仁)과 유향(乳香)을 넣고 약을 만들어 조각을 내서 붙이고, 또한 상회수(桑灰水)에 피마자(蓖麻子)의 잎을 함께 끓여서 자주자주 담가서 씻어 주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약을 지어 올리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6년(1628) 5월 20일
손가락에 상처가 난 인조를 치료하기 위한 주요 처방은 황납고(黃蠟膏)와 상회수(桑灰水)였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황납고는 손이 갈라져서 아픈 것을 발라서 치료하는 일종의 연고이다. 참기름 5돈을 약한 불로 끓인 후 황랍 1덩어리를 넣어 다시 달여 녹이는데 여기에 호분과 오배자 가루를 각각 약간씩 넣고 자주색이 될 정도로 볶아 우선 뜨거운 물로 환부를 씻고 불을 쬐어 말린 후 이 약을 바르고 종이를 붙이는 방법으로 사용한다고 하였다. 『의본(醫本)』에는 새살을 돋게 하는 약효도 있다고 한다. 인조에게 처방된 연고는 여기에 매핵인 즉 매실의 씨앗과 유향을 더한 것이었다. 매실의 씨앗은 번열(煩熱)을 없애는 효능을 지녔으며, 유향(乳香)은 『동의보감』에서 말하길 통증을 멎게 하고 새살을 돋게 하여 여러 가지 창(瘡)이 안에서 사라지게 한다고 하였다. 또 뽕나무를 태운 잿물인 상회수(桑灰水)의 경우 상처 속에 있는 피고름과 독수를 없앤다고 하였으며 여기에 더한 피마자(蓖麻子)의 잎은 붓고 헌데가 생긴 것을 치유하는 효능을 지녔다.
- 이규경(李圭景:1788~?)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