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

<5> 태종과 어의의 오진 논란,
세종의 주역점

의원(醫偃) 양홍달(楊弘達)·박거(朴居)·조청(曹聽)·원학(元鶴)을 의금부(義禁府)에 가두었다. 처음에 임금이 최한(崔閑)을 시켜 승정원(承政院)에 전하였다.
“성녕(誠寧)의 졸(卒)함에는 비록 ‘죽고 사는 것이 명(命)이 있다.’고 하나, 발병하던 초기를 당하여 허리와 등이 몹시 아팠는데, 의원 박거 등이 병세를 진찰하고 말하기를, ‘풍증(風證)입니다.’고 하고 인삼(人蔘) 순기산(順氣散)을 마시게 하여 땀을 지나치게 많이 흘렸다.”

-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 4월 4일

태종 18년(1418) 1월 26일. 왕실에 비상이 걸렸다. 원경왕후의 막내 왕자인 성녕대군에게 두창(豆瘡) 발병하여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에 태종은 총제(摠制) 성억(成抑)을 흥덕사(興德寺)에 나아가서 정근(精勤)하게 하였다. 정근은 승려들이나 무당을 모아 정성스럽게 기도를 드리는 일을 말한다. 또 검교 판내시부사(檢校判內侍府事)인 김용기(金龍奇)에게 대군의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구병원장(求病願狀)을 써 절령(?嶺:황해도 자비령) 나한전(羅漢殿)에 가서 빌도록 하였다. 그러는 한편 맹인 점쟁이들에게도 왕자의 길흉(吉凶)을 물어 길(吉)하다는 점을 얻었으나 왕자의 병은 날로 심해져만 갔다.

이에 다시 청성군(靑城君) 정탁(鄭擢)이 『주역(周易)』을 이용해 점을 쳐 태종에게 올리면 이를 충녕대군이 명쾌하게 풀이하여 세자와 신하들이 감탄하였다고 한다.

성녕대군의 병구원을 둘러싼 이 날의 기록은 조선 초기의 의료실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이를 통해 우리는 전염병인 두창을 얻어 생사의 갈림길에 선 왕자를 구하는 방법으로 의사의 처방뿐만 아니라 무당, 점쟁이, 주역의 철학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인간의 생로병사를 자연의 힘에 크게 의지했던 고대에는 무당이 의사의 역할을 했다. 의술이나 의사를 뜻하는 의(醫)의 받침이 원래는 유(酉)가 아닌 무(巫)라는 점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 유리왕 19년(기원전 1년) 9월 “9월에 왕이 질병에 걸렸다. 무당이 말하기를 ‘탁리와 사비가 빌미가 되었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이를 사과하도록 하니 곧 병이 나았다.”라는 기록을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무당과 민간 의술에 의지해 치료 행위를 진행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불교가 들어오는 삼국시대 불교 의학 및 불당에서 비는 행위의 비중이 높아진다.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면서 의학이 발전하였으나 전염병인 두창의 치료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병의 예후를 무당과 점쟁이, 승려에게 의지해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유학자들은 사서오경 중 하나인 『주역』으로 길흉화복을 점쳤다. 세종인 충녕대군이 주역으로 친 점을 풀이한 것도 한의학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이처럼 왕실에서조차 의료와는 동떨어진 행위가 벌어진 것은 당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절박함과 함께 어의(御醫)의 진단능력 부족도 그 원인이었다.

『태종실록』에 실린 「성녕대군 이종(李?) 졸기」에 따르면 충녕대군이 의원 원학(元鶴)과 함께 밤낮으로 성녕대군의 곁을 지키면서 의서를 연구하고 친히 약을 처방하는 등 치료를 시도하였다고 한다. 충녕대군이 전문 의원이 아님에도 이같이 한 까닭은 동생을 향한 형의 지극한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그만큼 어의를 신뢰하지 못했던 것으로도 풀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성녕대군이 죽은 후 어의의 오진 여부를 둘러싼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한다. 특히 아들을 잃은 태종의 분노는 더하였다. 그는 어의들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그들을 의금부에 하옥하도록 한다.

사실, 태종은 3년 전 갑작스럽게 숨진 유독 예뻐하였던 셋째 딸이자 세종의 누이인 경안공주의 진단부터 어의들의 진단에 대해 문제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임금은 “열(熱)이 나는 증세였는데도 정기산(正氣散)을 바쳐서 병을 위독하게 만들어 공주가 죽게 되었는데, 어의가 말하기를, ‘신이 의료를 업(業)으로 한 이래 이와 같은 병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변명했다.”라며 어의에 대한 불신이 오래되었음을 드러낸다. 참고로 정기산은 곽향정기산, 불환금정기산과 같이 창출, 후박, 진피, 감초 등 감기 같은 외감으로 인한 위장 장애를 다스리는 처방이다. 이런 진단과 처방에 의문을 품었던 태종은 직접 의학서적을 본 뒤 손의 뒤틀림은 심한 발열의 결과인데, 위장을 다스리는 처방은 사람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임을 알아낸 것이다.

그런데 성녕대군이 두창이 발병했던 첫날에 허리와 등의 통증을 호소했는데 이때 어의들은 풍증(風症)으로 판단해 인삼순기산(人蔘順氣散)으로 땀을 흘리게 한 것이다. 어의들이 처방한 인삼순기산은 중풍기허(中風氣虛)에 쓴다. 기(氣)가 허(虛)하여 입이 비뚤어지고, 근육이 뒤틀림과 마비, 목의 뻣뻣함, 언어가 어눌할 때 효과적이다. 약재로는 기를 보하는 열을 내는 인삼, 천궁, 진피를 비롯해 백지, 갈근, 길경, 후박, 마황 등이 포함된다. 반면 전염병인 두창은 음액(陰液)이 마르고 허한 상태에 바이러스가 침투한 것이다. 따라서 따뜻한 약재로 몸을 보하는 것은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태종은 의서를 살펴보았을 때 “허리와 등이 몹시 아픈 것은 두창(豆瘡)이 발생하기 전의 초기 증상이었고 또 창진(瘡疹)의 증세가 순조롭지 못한 뒤에도 능히 구원할 수 있는 약(藥)으로써 방서(方書)에 보이는 것이 하나가 아니었다.”라고 하며 마음을 다해 정밀하게 살피고, 알맞은 데 따라 약을 썼다면 나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어의들의 오진을 추궁하였다. 더구나 성녕대군이 위독한 날에는 얼굴이 회백색이 되었는데 어의는 안색을 호전되는 것으로 믿고, 약을 쓰지 않았으니 그 화가 더했을 것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두창은 유행병으로 상한이나 유행병의 열독이 속에서 성하면 대부분 포창(?瘡)이 생긴다. 창의 크기와 모양이 완두콩 같아서 완두창(豌豆瘡)이라고 하고, 그 색은 희거나 벌겋다. 꼭대기에 물집이 생겨 흰 고름이 있으면 그 독은 가벼운 것이다. 자흑색의 뿌리가 은은히 기육 속에 있으면 그 독은 중한 것이다. 심하면 온몸에 두루 생길 뿐만 아니라 오장과 칠규(七竅)에도 다 생긴다.”라고 하였다. 또 “겨울철이 따뜻하면 봄에 두창이 발병할 수 있다. 미리 삼두음(三豆飮)이나 유음자(油飮子:좋은 참기름)를 먹여야 한다.”고 하여 그 예방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삼두음의 제조법에 대해서도 “팥, 검정콩, 녹두 각 1되, 감초 5돈의 이 약들을 물에 삶아 날마다 그 즙을 마시고 콩을 마음대로 먹게 한다. 이미 전염되었으면 가벼워지거나 낫고, 아직 전염되지 않았을 때 7일 이상 먹으면 평생 돋지 않는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실제 『승정원일기』 고종 22년(1885) 2월 19일 기록을 보면, 고종이 대신들과 두창에 대해 이야기하며 “신열(身熱)이 있을 때 삼두음(三豆飮)을 복용하니 매우 좋았다.”라고 하여 왕실에서도 복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동의보감』에서는 두창을 쉽게 앓는 방법 즉 희두방(稀痘方)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주사를 먹이는 법(服朱砂法). 연생제일방(延生第一方), 희두토홍환(稀痘兎紅丸), 척예면두탕(滌穢免痘湯), 독성단(獨聖丹), 백수산(百壽散), 복매화방(服梅花方) 비전희두탕(秘傳稀痘湯) 등 여덟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중 비전희두탕을 살펴보면 ‘6월의 초복날에 조롱박의 어린 넝쿨 수십 뿌리를 그늘에 말린다.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조롱박 넝쿨을 솥에 넣고 1동이를 끓여 아직 두창이 돋지 않은 소아의 온몸과 얼굴과 머리를 빠짐없이 씻으면 두창이 돋지 않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만(申曼:1620~1669)의 『주촌신방(舟村新方)』에서도 “소아가 미리 희두방(稀痘方)을 복용하여 태열의 독을 없애면, 두진을 행할 때 두과(痘顆)가 작고 또 제반 위험한 증상이 없을 것이다.”라 하여 그 예방책의 하나로 희두방을 언급하고 있다.

또 발병하면 환자를 격리하고 특별하게 제작된 약물로 씻고, 음식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한편, 정조 때 정약용과 박제가 등에 의해 완두창의 예방접종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정약용 등이 시행한 종두법은 두창을 앓은 사람에게서 두즙(痘汁)을 취하여 인체에 불어넣는 방법이었다.

여하튼 태종은 성녕대군의 죽음 후 의료체계를 점검하여 미신적 행위를 중단시킨다. 둔갑술 치료법인 총지종(摠持宗)의 국가적 지원을 중단하였고, 맹인과 무녀의 의료행위도 금지하였다. 누이와 동생을 허망하게 잃은 세종 또한 이렇듯 후진적인 의학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으며 『의방유취』 『향약집성방』 등 다양한 의학서적의 출간을 포함한 비약적인 의학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다만 백성들에게 여전히 두창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남았다. 그래서 두창은 두창신, 마마신, 호구 마마 등의 이름의 신으로 불리었으며 초상집 출입, 기름, 꿀, 누리고 비린 냄새, 더러운 냄새 같은 마마신이 두려운 것들을 피하며 굿을 하는 등 오랫동안 미신 행위는 이어졌다.

『강희자전(康熙字典)』에, “신두법(神痘法)은 대체로 두즙(痘汁)을 코에 넣고 호흡하면 당장 솟는다.”
하였다. 나는 항상 묘한 방법이 있는데도 우리나라에는 전해오지 않는다고 의심하여 섭섭하게 생각하여 왔다.
...(중략)...
이때 초정(박제가)은 영평현(永平縣)의 지현(知縣)이 되어 섭섭해하며 부임하였는데 그 후 수십 일 만에 초정이 다시 와서 기뻐하며 나(정약용)에게,
“두종이 완성되었네.”
하므로, 나는,
“어떻게 된 것이오?”
하였더니, 초정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영평현에 부임하여 이 일을 관리들에게 이야기하였더니 이방(吏房)이란 자가 흥분 하며 잘된 것 하나를 구하여 먼저 자기 아이에게 접종하였지. 그랬더니 종핵은 비록 미소하였으나 종두는 잘 되었다는구려.”
두 번째로 관노(官奴)의 아이에게 접종하고 세 번째로 초정의 조카에게 접종하니, 종핵도 점점 커지고 종두도 더욱 훌륭하였다. 그제야 의사(醫師) 이씨(李氏)라는 이를 불러 처방을 주어 두종을 가지고 경성(京城) 이북 지방으로 들어가게 하였더니 선비 집안에서 많이들 접종하였다 한다.
이해 6월에 건릉(健陵 정조(正祖)의 능)이 승하하였다. 다음 해 봄에 나는 장기(長?)로 귀양가고 초정은 경원(慶源)으로 귀양갔다. 그런데 간사한 놈이 의사 이씨를 모함하여 시의(時議 신유사옥(辛酉邪獄)을 가리킴)로 무고하니 의사 이씨가 고문받아 거의 죽게 되고 두종도 단절되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정묘년에 내가 강진(康津)에 있으면서 듣건대 ‘상주(尙州)에 있는 의사가 종두를 접종하는데 1백 명 접종하여 1백 명이 완치되어 큰 이익을 얻었다.’ 하니 아마도 그 처방이 영남에서 다시 유행되었던 모양이다. 내가 편집한 본방(本方)을 난리에 잃어버렸으므로 여기에 전말을 기록하여 아이들에게 보인다.

- 정약용(丁若鏞:1762~1836)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10권 「종두설(種痘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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