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

<12> 세종대왕 시대 어의(御醫)와 대장금

1419년 세종은 정사를 논의하던 중 신하의 황당한 청을 받는다. 형조판서였던 김점(金漸:1369~1457)이 감기에 걸린 아들에게 어의(御醫)를 보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어의는 궁궐에서 임금과 왕족을 치료하는 전담의원으로 가끔 특별하게 궐밖에 사는 왕자나 관료에게 어의를 파견하는 은혜를 내리는 일도 있긴 하였다. 그러나 신하가 임금에게 어의 파견 요청은 있을 수 없는 경우였다.

형조판서인 김점의 행동은 당시의 권력 지도를 통해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당시 임금은 세종이었지만 여전히 군권을 비롯한 권력은 상왕인 태종에게 있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눈치를 살피며 정치 실무를 익히는 일종의 ‘수습 군주’와 같았다. 임금을 대신해 정무를 보는 대리청정을 하던 왕세자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세종은 현안에 특별한 의견을 내기보다는 앞선 정책을 계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젊은 왕, 세종의 위치는 신하들의 눈에는 어렵고도 높은 태종의 위상과는 그 차이가 있던 것이다.

특히, 김점은 명문 가문 출신이었다. 고려 말 무신으로 1360년 홍건적으로부터 개경을 수복하여 공신이 된 김한귀(金漢貴)가 그의 할아버지였고, 아버지 김린(金潾) 또한 공민왕 때 문신이었다. 그 역시 이성계가 개국 후 고려의 인재를 가려 뽑을 때 장군으로 천거되어 중용되었다. 특히 그의 딸은 태종의 후궁인 숙명궁주(淑恭宮主)였고, 그의 아내 권씨는 명나라 후궁인 권씨의 일족이기도 했다.1) 더구나 당시 김점이 나이는 50세였고, 세종의 나이는 22세였다.

임금의 권위에 손상을 입은 세종은 분노했다. 임금은 정색하며 김점과 참여한 신하들을 향해 “여러 중신과 신하들이 정사를 아뢰는 이 편전은 신하를 맞이하여 정사를 모의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공공연하게 자기의 사사로운 청을 하며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김점의 잘못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간의 관원이 곁에서 시좌(侍坐)하여 듣고서도 감히 규탄하지 않으니 그 또한 비겁한 것이로다.”라고 질책했다.

공식적인 왕과 왕실가족의 의료를 담당한 어의의 벼슬은 내의원(內醫院) 소속의 당상(堂上) 의관이었다. 또한 의술에 능한 당하(堂下) 의관인 내의(內醫) 중에서도 차출되었다. 의약동참(議藥同參)과 침의(鍼醫)는 당상, 당하를 막론하고 모두 어의로 불렸다. 왕실의 여성 진료와 치료는 의녀(醫女)의 몫이다. 의녀제도는 남자 의원의 손길을 거부하는 사대부 여성을 위해 시작되었다.

제생원(濟生院)에 명하여 동녀(童女)에게 의약(醫藥)을 가르치게 하였다. 검교 한성 윤(檢校漢城尹) 지제생원사(知濟生院事) 허도(許衜)가 상언(上言)하였다.
“그윽이 생각건대, 부인이 병이 있는데 남자 의원에게 진맥(診脈)하여 치료하게 하면, 혹 부끄러움을 머금고 나와서 그 병을 보이기를 즐겨 하지 아니하여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원하건대, 창고(倉庫)나 궁사(宮司)의 동녀(童女) 수 10명을 골라서, 맥경(脈經)과 침구(針灸)의 법(法)을 가르쳐서, 이들에게 치료하게 하면, 거의 전하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라 제생원으로 하여 그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 『태종실록』 태종 6년(1406) 3월 16일

위 기록처럼 지제생원사 허도의 상언을 태종이 윤허함으로써 의녀제도(醫女制度)가 시작됐다. 세종은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10~15세의 총명한 관아의 여종을 의녀로 양성하는 것을 제도화했다. 의녀는 한문과 한글 교육과 함께 산서, 직지맥, 찬도맥, 가감사십방, 화제방, 부인문 등 진맥법, 조제법, 침구법 등 전문영역을 공부했다. 심화 교육을 받은 의녀는 왕실 여성을 치료하는 내의원과 사대부와 일반 백성을 진료하는 외의원(外醫院)으로 각각 배치됐다.

의녀는 남자 의원의 보조원이었다. 의녀는 진료와 간호를 하지만 처방은 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원칙적으로 처방을 하는 어의는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중종 임금 때 대장금(大長今)은 임금의 어의인 여의(女醫)로 승격됐다. 『중종실록』 중종 19년(1524) 12월 15일에는 “의녀 대장금의 의술이 무리 중에서 뛰어나 내전에 출입하며 간병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장금은 중종 28년(1533)을 비롯하여 39년(1544) 1월 29일, 39년 10월 26일, 39년 10월 29일 임금의 약을 다른 어의들과 논의하고 처방했다.

내의원은 임금의 약을 만들던 관서였다. 태종 때 내약방으로 불렸으나 세종 25년 6월에 내의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관원은 16인으로 3품은 제거(提擧), 6품 이상은 별좌(別坐), 참외(參外)는 조교라고 하였다. 내약방과 내의원을 관장한 것으로 추측되는 전의감(典醫監)은 대궐에 약재를 공급하고, 임금의 약재 하사를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전의감과 내의원은 왕과 왕족을 위한 기관이고 어의는 왕과 왕실 가족의 치료를 위한 의원이다.

백성이 이용하는 의료기관은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가 있었다. 혜민서는 서민의 질병을 치료하는 곳이고, 활인서는 도성의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기관이었다. 구체적으로 혜민서는 일반 백성의 질병을 다루는 시립병원 같은 역할을 했다. 활인서는 무의탁 환자 진료와 전염병 환자 치료와 간호를 맡았고 무연고 시신 매장도 담당했다.

세종은 전옥(典獄:오늘날의 감옥)에 월령의(月令醫) 즉 전속 의관을 두어 죄의 경중을 막론하고 치료를 받게 하였고, 전국 각 포구에 해도의원(海道醫員) 즉 일종의 군의(軍醫)를 파견해 상근하게 하기도 했다. 전염병이 돌면 태종이나 세종은 각 고을 수령에게 약재를 내려 환자를 돌보게 했다. 혜민서나 활인서는 도성을 중심으로 설치되어 지방에는 한양의 혜민서나 활인서 같은 전문적인 의료기관은 없었다. 다만, 관아에 월령의(月令醫), 심약(審藥)2)을 두었으며, 『세종실록』 세종 5년(1423) 12월 4일을 통해 각 지방의 관비 중 총명한 자를 뽑아 올려 침구와 조제법을 가르친 후 의술을 가르쳐 다시 돌려보내 병자들을 치료하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효종이 돌아가시자) 대사헌 이응시, 행 대사간 이상진 등이 아뢰었다.
어의 유후성(柳後聖)은 대행 대왕께서 처음 종환(腫患)이 있을 때부터 작은 부스럼이라고만 하였고, 병세가 점점 중해가는데도 별달리 생각하는 바가 없이 다만 저와 친숙하고 잘 따르는 부류 한두 명을 천거하여 입시를 시켰으며, 또 병들어 손 떠는 의원을 시켜 억지로 침을 잡게 하였습니다. 어의 조징규(趙徵奎)는 후성에게 아부하면서 그와 한패가 되어 병증을 논하고 약을 처방할 때 오직 그가 시키는 대로만 한채, 군부의 병환은 생각지 않고 오직 후성과 의견을 달리하는 점이 있을까 염려하였으니, 후성이나 징규나 그 죄가 같습니다. 그리고 신가귀(申可貴)는 자기 수전증이 중함은 생각지도 않고 결국 조심성 없이 침을 놓다가 혈락을 잘못 건드렸습니다. 이 3인의 죄는 천지에 사무치고 사람들이 그들의 살을 먹고 싶어합니다. 왕법(王法)으로 보아 결코 한 시각도 용서할 수 없으니 서둘러 방형(邦刑)을 바로잡으시고, 그 나머지 입시 했던 모든 의원도 모두 멀리 귀양보내소서.

-『현종개수실록』 현종 즉위년(1659) 5월 17일

  • 1) 태감(太監) 황엄(黃儼)이 아뢰기를, ‘이 재상(宰相)은 조선(朝鮮) 전하(殿下)와 연혼(連婚)한 자이며, 또 권파파(權婆婆)의 족속(族屬)입니다.’하니, 황제가 특별히 후하게 위로하고, 권파파도 봉천문(奉天門)까지 나와서 김점을 인견(引見)하고 말하기를, ‘황제가 전하의 성심(誠心)에 대하여 참으로 중(重)히 여깁니다.’하다. -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 태종 5월 19일
  • 2) 외관직으로 궁중에 헌납하는 약재를 심사하기 위하여 각 도에 배치한 관원(종9품)으로 전의감·혜민서의 관원 중에서 선임하였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의료제도(醫療制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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