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

<19> 만성피로증후군과 임금의 허손증

임금이 허손병(虛損病)을 앓은 지 여러 달이다. 정부(政府)와 육조(六曹)에서 육찬(肉饌)을 두세 번을 청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셨다. 병세는 점점 깊어 약의 효험이 없었다.

- 『세종실록』 세종 4년(1422) 11월 1일

조선은 유교적 사상과 질서를 이념으로 세우고 이에 대한 실천을 지향하는 국가였다. 그런 유교의 핵심가치가 바로 효(孝)였다. 효는 모든 유교 질서의 바탕으로 그 정신은 나라의 어버이에 대한 효, 즉 충(忠)으로까지 확장된다. 유교 사회인 조선의 왕은 그래서 모든 이에 앞서 효의 모범을 보여야만 했고, 이를 통해 백성과 관료들을 효와 충의 삶으로 이끌었다.

효는 살아있는 부모에게나, 돌아가신 부모에게나 그 정성과 행위가 똑같아야 했다. 유교에서 제사에 신경을 쓰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를 여윈 자식은 죄인이 되었다.

세종 4년 5월 10일, 태종이 승하했다. 지극한 슬픔에 빠진 세종은 상중(喪中)의 의례인 상례(喪禮)에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상식(上食)을 올리고, 곡을 하고, 감선(減膳)하는 등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죄인의 삶을 살았다.

태종이 승하한지 6개월이 지난 11월 1일, 신하들은 갈수록 허약해져 가는 임금의 건강을 심히 걱정하게 된다. 영양 결핍과 과로, 지극한 슬픔이 겹친 허손병(虛損病)으로 판단하고, 여러 달 진행된 병이 계속 악화되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유정현(柳廷顯), 이원(李原), 정탁(鄭擢)등을 비롯한 여러 당상관은 함께 나라의 안위를 거론하며 임금에게 육식을 거듭 청한다.

전하께서 지존(至尊)하신 몸으로 소찬(素饌)만 진어(進御)하시고 만기(萬機)를 보살피시면서 3년의 상제(喪制)를 마치고자 하신다면, 병이 깊어 치료하기 어렵게 되시리니, 옛 사람이 말하기를, ‘죽은 이를 위하여 산 사람을 상해(傷害)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또 ‘육즙(肉汁)으로서 구미(口味)를 돕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제 세자(世子)가 어린데, 전하께서 상경(常經)만 굳이 지키어, 병환이 깊어져서 정사(政事)를 보지 못하시게 된다면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의 복이 되지 않습니다.

신하들이 세종에게 육식을 청한 것은 임금이 상중에 고기를 물리쳤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세종은 죄인으로서 고기반찬이 없는 식사인 감선(減膳)을 했기 때문이다. 또 임금이었기에 아무리 상중이라도 나랏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이와 같은 생활이 지속되자 건강했던 몸은 마르고, 체력은 급격히 떨어졌고, 면역력 저하와 지속적 피로는 곧 허손증으로 발전해 세종을 괴롭힌 것이다.

육체를 피로하게 하면 기(氣)가 상하게 되고, 마음을 피곤하게 하면 혈(血)이 상하게 된다.
허손이라는 질병은 오로(五勞)에서부터 생겨서, 이어 육극(六極)이 생기고, 다시 칠상(七傷)이 생겨나게 된다.
먹는 양이 줄고 기억력이 나빠지며 정액이 새어 나오고 꿈에서 몽정하며, 허리ㆍ등ㆍ가슴 옆구리의 힘줄과 뼈가 땅기면서 아프고, 갑자기 몸에서 열이 후끈 나며 식은땀이 나고, 가래가 끓고 기침을 하는데, 이것이 허로에 보이는 일반적인 증상이다.
심(心)과 폐(肺)가 허손되어 낯빛이 나빠지는 것을 ‘양허(陽虛)’라고 하고, 간(肝)과 신(腎)이 허손되어 몸의 외형이 위축되는 것을 ‘음허(陰虛)’라고 한다.
폐가 허손되면 기를 더해주고, 심이 허손되면 혈을 보해주며, 간이 허손되면 몸속을 느슨히 해주고, 신이 허손되면 정(精)을 단단히 하며, 비(脾)가 허손되면 음식을 조절하고 온도를 적당히 맞춰준다. 기와 혈을 화평하게 하여 수(水)와 화(火)가 서로 교류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 현재덕(玄在德:1771~?) 『본초유함요령(本草類函要領)』「통치부(通治部)」

순조 시대 내의원 의관이었던 현재덕이 저술한 위 책의 기록에는 허손이란 질병의 원인을 오로(五勞)로부터 생긴다고 하였는데, 『제병원후론(諸病源候論)』에는 오로(五勞)는 오장(五藏)을 상하게 하는 것으로 지로(志勞), 사로(思勞), 심로(心勞), 우로(憂勞), 수로(瘦勞)라 하였다. 이는 곧 정신 활동이나 감정에서 기인하는 불안함에 따른 극심한 피로, 불규칙한 섭생과 생활, 신정(腎精) 과다소모로 인한 기력저하 등을 일컫는다. 『의학강목(醫學綱目)』에서는 “육극(六極) 곧 힘줄, 맥박, 살, 피부, 털, 뼈(筋脈肉皮毛骨)이 초췌해지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일곱 가지의 증상이 발생한다고 본다.

즉 이를 통해 본 허손증은 정신적 불안과 피로 등에 따른 몸의 무리로 식은 땀, 어지럼증, 소화불량, 체중감소, 의욕상실, 불면, 불안, 기침, 가래, 우울, 전신통증, 식욕저하, 유정(遺精), 조열(潮熱) 등이 발생하는 병으로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세종은 아버지의 상을 당한 큰 슬픔을 겪으면서도 여러 달 정사를 살피며 힘든 상례를 소홀함 없이 거행하였고 거기에 고기가 없는 반찬 등 음식 또한 평소보다 부실하게 섭취함에 따라 정기(正氣)와 기혈(氣血)이 허약해졌고 이에 따라 만성피로증후군과 결핵, 빈혈, 신경쇠약 증세를 보인 것이다. 사실 조선의 임금 중 이 상례로 인해 건강을 크게 해친 사례가 여럿 있었다.

대표적인 임금이 바로 문종이다. 문종은 직접 무기를 조련하고 손질하며 병법을 저술할 정도로 무예에도 뛰어나 건강한 왕이었으나 1446년 어머니인 소헌왕후, 1450년 아버지인 세종의 상례를 잇따라 행하며 기력이 쇠진해졌고 결국 병을 돌보지 못해 재위 2년 만에 돌아가시고 만다. 그리하여 『문종실록』 「문종대왕묘지문」에는 “음료(飮料)를 입에 넣지 않는 것이 3일이나 되니 슬퍼하여 몸이 바싹 여윈 것이 예제(禮制)를 지나쳤으며 ...(중략)...마땅히 물러가 거처하여 옥체(玉體)를 조보(調保)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굳이 청해도 허락하지 아니했으며, 삭망(朔望)과 상식(上食)에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면서 3년상을 마쳤었습니다.”라고 하여 상례로 인해 몸이 많이 상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인종 또한 아버지인 중종이 훙서하자 염장이 된 음식은 전연 먹지 않고 죽만을 먹고 상례를 행해 결국 재위 9개월 만에 돌아가시고 만다.

이렇듯 세종이 상례에 몸을 상할까 걱정한 신하들은 “태종의 유교(遺敎)에도 또한 말씀하시기를, ‘주상은 고기가 아니면 진지를 들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 권도를 좇아 상제(喪制)를 마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한다. 권도란 상황에 맞게 하는 응급조치나 임시방편, 유연성 있는 행동을 일컫는다. 태종은 아들이 지나치게 상례에 얽매여 건강을 잃을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이처럼 신하들은 태종의 유교까지 꺼내놓으며 고기반찬으로 체력을 보할 것을 청한 것이다. 그럼에도 세종은 듣지 않았으나 신하들의 계속된 요청에 임금은 수라에 육즙이 포함되는 것을 허락한다.

허손은 각 장기의 허실을 살펴서 기(氣), 혈(血), 음(陰), 양(陽)을 고루 균형 있게 보해야 한다. 『동의보감』에서는 허손의 처방으로 경옥고(瓊玉膏), 진심단(鎭心丹), 십전대보탕(十全大補湯),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 녹용대보탕(鹿茸大補湯), 당귀고(當歸膏), 침향별갑산(沈香鱉甲散), 구선왕도고(九仙王道糕)등을 들고 있다.

증상에 따라 혈색이 흐리고 눈이 어두워지는 간허(肝虛), 기혈이 약한 심허(心虛), 제대로 먹지 못해 마르는 비허(脾虛), 기침과 가래에 숨이 가파른 폐허(肺虛), 정신이 혼미하고 뼈마디가 쑤시는 신허(腎虛)가 증상이 있다.

또 허로를 두루 치료하는 약에 대해 “사지가 약하고 무력하여 아주 노곤한데, 음양 중 어느 것이 먼저 손상되었는지 알 수 없을 때는 여름에는 육미지황원(六味地黃元)을 쓰고, 봄가을에는 신기환(腎氣丸)을 쓰며, 겨울에는 팔미환(八味丸)을 써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밖에도 쌍화탕(雙和湯), 소요산(逍遙散), 천왕보심단(天王補心丹), 사물탕, 천진원(天眞元), 인삼고(人蔘膏) 등이 주로 처방되었다.

『승정원일기』 인조 23년(1645) 5월 15일에는 인조의 허손증상에 대한 진단과 그 처방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약방이 두 번째 아뢰기를, “방금 하교하신 대로 다시 쓸 약을 전적으로 박군에게 물었더니, ‘성상의 기후의 여러 증상은 모두 심(心), 비(脾), 신(腎)의 세 장기가 허손(虛損)된 데서 비롯되었으므로, 만약 성질이 찬 약을 쓰면 비위가 더욱 손상되고 성질이 따뜻한 약을 쓰면 열이 더욱 치솟을 것입니다. 반드시 심을 진정시키고, 열을 내리며, 화평하게 보하는 약을 써야 해가 없고 효과를 볼 것입니다. 이신교제단(二神交濟丹)에 들어가는 것은 모두 열을 내리고 보해 주는 약재이며, 심, 비, 신의 세 장기가 허손된 것을 전적으로 치료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즉시 이 약에 대하여 여러 어의에게 물었더니 모두 합당하다고 하였습니다. 당연히 이대로 지어 들여야 하나 약을 의정(議定)하는 막중한 일은 아무리 충분히 토의해도 지나치지 않으므로 이찬과 유후성이 오늘내일 안으로 들어올 것이니, 이들이 와서 모인 뒤에 함께 의논하여 정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동의보감』에서도 이신교제단(二神交濟丹)은 ‘허로를 보하여 심경, 비경, 신경의 허손을 치료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안에 들어갈 약재는 복신, 의이인, 산조인, 구기자, 백출, 신국, 백자인, 검인, 생건지황, 맥문동, 당귀, 인삼, 진피, 백작약, 백복령, 축사인이다. 그리고 이 약들을 가루 내어 끓인 물 4잔, 졸인 꿀 4냥, 산약 가루 4냥을 넣고 쑨 풀로 반죽하여 환을 만든 것이 바로 이신교제단이다. 복용은 미음과 함께 50~70알씩 먹는다고 한다.

영조 5년(1729) 11월 20일,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소상(小祥) 제사를 지낸 후 입맛이 써 먹는 양이 줄고 체기까지 보이며 수척한 징후를 보이자 성심산(醒心散)과 자음건비탕(滋陰健脾湯)을 올린다.

『승정원일기』 현종 2년(1661) 11월 6일 기록에는 왕대비(인선왕후)가 허로증의 증세를 보이자 소요산(逍遙散)을 3첩 지어 올렸다고 한다. 『동의보감』에도 소요산은 여자들이 허로 증세를 보일 때 쓴다고 하였다.

또 『일성록』 정조 즉위년(1776) 3월 19일에는 대비(정순왕후)가 피로가 쌓인 나머지 감기 증세가 있고 또 해수(咳嗽:기침) 증세를 보이자 ‘삼향산(蔘香散)에 계지(桂枝)와 생강(生薑)을 추가하여 진어’하였다고 했는데 『동의보감』에 이 삼향산은 “인삼, 백출, 황기, 산약, 백복령, 연육, 감초, 오약, 사인, 귤홍, 건강, 정향, 목향, 백단향, 침향을 썰어 1첩으로 하여 생강과 대추를 넣어 물에 달여 먹는다.”라고 하며 “허로로 몸이 여위고 기운이 없으며, 점차 노채(勞?)가 되는 경우를 치료한다.”고 하였다.

2품 이하가 먼저 물러났고 나는 광화문으로 나와 다시 창경궁으로 가서 동료들과 정원으로 가서 아뢰기를,
“주상(선조)의 효성이 지극하시어 예를 행함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빈소를 하기 전부터 오랫동안 죽도 드시지 않아 허손(虛損)이 심하고 짚자리에 노처(露處)하느라 손상됨이 또한 많으니 이제 만약 즉시 수라를 드시지 않으면 손상이 쌓인 나머지 기력이 더욱 피곤하여 부지하시기 어려울까 두렵습니다. 성복이 이미 지났으니 청컨대 즉시 수라를 드시어 성궁(聖躬)을 보전하소서. 그리고 의려(倚廬)도 매우 완전하고 꼼꼼하게 하여 찬바람이 들지 않게 하여 잠자리를 편안케 하시어 위로는 공의전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아래로는 신민의 바람에 부응하소서. 또 주상께서 홀로 일실(一室)에 거처하시고 다만 내시만 곁을 모시어 건강과 기거를 외신(外臣)들이 알 수가 없으니 민망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가끔 대신이나 시종(侍從)들을 불러 안부를 살필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주상께서 모두 계(啓) 한대로 하겠다고 답하시자 신 등이 기뻐하며 물러나왔다.

- 유희춘(柳希春:1513~1577) 『미암집(眉巖集)』 1575년 1월 7일

SNS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