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상담

<25> 왕실의 태교와 식치

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
선비(先?:폐비 윤씨)께서는 성종의 배필로 곤전(坤殿)의 지위를 내전에서 바로 하고, 국모로서의 예를 육궁(六宮)에서 본보이셨다. 또 나를 가지면서 일찍이 태교(胎敎)를 잘 하시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1504) 5월 6일

연산군은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하면서 자신이 어머니의 태교로 태어났음을 말하였다. 하지만 연산군은 역대 임금 중 최악의 태교로 꼽힌다. 왕비가 아이를 가진 후에는 임금 또한 후궁과의 잠자리를 자제하고 그 몸가짐 또한 바르게 해야 했다. 그러나 성종은 다른 후궁들을 가까이하여 그 후궁들이 임신까지 하게 만들었다. 이에 왕비는 투기(妬忌)하는 마음으로 임금과 다투게 되니 그 마음에 고스란히 연산군에게 전해졌을 터다. 그러함에도 연산군 본인이 위와 같이 기록하게 한 것은 당위성을 만들고 싶어하는 마음이 엿보인다.

조선왕실의 태교는 세종의 맏딸인 정소공주를 필두로 정희왕후,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등 여러 임금에 관한 기록에서도 보인다. 이처럼 왕실에서는 태교를 매우 중요시했다. 또 그에 대해선 왕 또한 숙지하고 익혀야 할 덕목으로 이해되었다. 『영조실록』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실려 있다.

“『소학』은 바로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인데, 어찌하여 열녀전(列女傳)의 내용이 들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람이 생겨난 근본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에 첫머리에 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린아이가 뱃속에 있는데 그 어머니가 어떻게 가르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아기를 배어서 움직일 적에나 고요히 있을 적에나 착한 일을 행하면, 그 아들이 나서 저절로 어진 사람이 됩니다. 이러므로 아기를 배었을 때 태만할 수 없음을 보인 것입니다.”

- 『영조실록』 영조 42년(1766) 5월 27일

앞장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조선은 태교 철학을 통해 성리학적 가치관을 확산시키려는 목적이 있었고, 다음 왕위에 오를 왕자가 태아 때부터 좋은 태교를 하면 훌륭한 자질을 갖고 태어날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한편, 태교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섭생이다. 『부인대전양방(婦人大全良方)』에서는 “임신을 했을 때 조양(調養:음식이나 주위 환경, 움직임 등을 알맞게 조절하여 쇠약한 몸을 다시 좋아지게 함)을 한 번이라도 잘못하면 안으로 중앙을 지키는 것에 부족함이 있게 되고, 밖으로 몸을 강하게 하는데 부족하게 되며, 기운과 형체가 채워지지 못해 질병이 생긴다.”라고 하여 섭생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율곡 이이가 선조에게 올린 『성학집요(聖學輯要)』에도 태교를 할 때 이상한 맛의 음식을 먹지 않도록 하고 있다. 세종 시대 편찬된 『태산요록』에서도 오장(五臟)이 다섯 가지 맛(五味)으로 생성됨을 들어서 태교할 때 섭생이 잘못되면 태아가 정상적으로 발육하지 못함을 경고하였다. 1)

조선 시대 음식은 음양오행으로 풀이해 선택되곤 하였다. 음식의 성질에 따라 분류를 하고, 요리와 상차림 때 상생 관계가 유지되도록 식단을 꾸렸다. 음양오행론은 우주의 변화와 인간의 생로병사를 음양과 오행의 순환 이치로 보는 철학이다. 음식 또한 임부와 태아에게 신체 조화와 균형을 꾀하는 것을 찾게 하였는데 예컨대, 더운 여름에는 수(水)의 성질인 콩이나 목(木)에 속하는 닭고기로 몸을 보하게 했다.

조선 후기 왕실의 출산 문화를 기록해 놓은 『임산예지법(臨産豫知法)』에는 해산 직전 “굳은 밥과 찰진 떡과 마른 떡과 마른 육포와 마른 어물과 기름진 것과 지짐하여 소화하기 어려운 것은 드시지 말 것.”이라 하였다. 이 글에는 “수시로 미역국에 흰 밥을 말아 드시어 원기를 회복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궁궐의 태교 음식 중 하나로 미역국이 애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또 영조의 어머니인 숙의 최씨의 출산 풍경을 담은 『호산청일기』에는 기운을 복돋기 위해 ‘인삼차’를 달여주었다고 한다.

영조 시대 『승정원일기』를 살펴보면 임신한 세자빈(혜경궁 홍씨)에게 대추미음(大棗米飮), 닭을 고아 만든 미음(鷄米飮), 닭곰탕(鷄膏), 홍합탕을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외에도 의서에는 임신 후 복통이나 증세가 있을 때 잉어탕, 붕어죽, 오골계죽, 흑두(黑豆)를 비롯한 각종 콩으로 만든 음식, 식혜, 죽순 등이 좋다고 하였기에 올렸을 것을 보인다.

그리고 분만을 전후한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대개 궁귀탕(芎歸湯), 달생산(疸生散), 불수산(佛手散), 팔물탕(八物湯), 자소음(紫蘇飮), 금출탕(芩朮湯), 유백피탕(楡白皮湯), 백편두말(白扁豆末), 목맥말(木麥末) 등을 처방하여 복용하였다.

한편, 『호산청일기』에 따르면 해산 후에는 길일을 정해 숙의 최씨는 쑥탕에, 그리고 신생아인 영조는 복숭아나무 뿌리, 매화나무 뿌리, 자두나무 뿌리, 돼지 쓸개와 호랑이 머리뼈를 달인 물을 사용하여 몸을 씻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오골계나 묵은 닭을 잉어, 전복, 해삼 등과 함께 끓인 용봉탕(龍鳳湯)은 임신부는 물론이고 왕실 가족이 보양식으로 즐겼다고 한다. 특히, 1892년에 있었던 고종의 「망오순진찬연(望五旬進饌宴)」 즉 고종의 즉위 30주년과 탄신 40년을 기념한 잔치에도 이 용봉탕이 올랐는데 의궤에 따르면 닭, 잉어, 전복, 표고버섯, 소의 안심살과 머리뼈, 해삼, 잣 등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아이를 낳는 이치는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10개월을 채우면 산모의 뼈가 벌어지고 근육이 늘어나면서 아이가 태어나게 된다. 출산 후 100일 내에는 여전히 몸이 허약한데 요즘 사람들은 1개월이 지나면 평상시와 같이 회복된다고들 하니 어찌 그릇된 말이 아니겠는가? 음식을 조절하지 못하고 차고 더운 것이 어긋나면 혈기가 손상되어 질병이 발생하게 된다. 음식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여기에 다시 합병증이 발생하게 되므로 음식을 조절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의사이다.

- 『식의심감(食醫心鑑)』 「임신전후 질병과 식치의 여러 방법」

  • 1) 『태산요록』은 당시 산과의사와 조산원들의 참고서로 널리 이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 및 과학 발전의 제약성으로 인해 현재와 비교했을 때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내용도 일부 있다. 따라서 비판적으로 참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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