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세종의 다둥이 정책과
난임(難任) 치료
- 『세종실록』 세종 8년(1426) 6월 29일
예나 지금이나 인구는 국가경쟁력이다. 나라를 지키고, 세금을 걷는 기초 자원이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대로 갈수록 전쟁포로를 확보하는 것에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승전국은 포로를 경제적, 정치적 도약을 위한 디딤돌로 활용했다. 하지만 전쟁이 없는 시기엔 내부적으로 인력을 충원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나라는 출산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그래서 한 번에 여러 명을 출산하는 일을 매우 상서로운 일로 여겼다.
기록을 보면 삼둥이 이상이 태어나면 이례적인 일로 기록하고, 나라에서 양육비를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 『삼국사기』 벌휴(伐休)왕 10년(193) 3월 기록을 보면 “한기부(漢祇部)의 여자가 한 번에 아들 넷, 딸 하나를 낳았다.”고 한다. 이는 다섯 쌍둥이를 낳은 기록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다둥이에 대한 기록이다. 다섯 쌍둥이는 한 번이었지만 네 쌍둥이는 통일신라에서 3회, 조선에서 5회 등 8차례가 보인다. 세쌍둥이는 비교적 흔해 조선의 기록에서만 151회를 찾을 수 있다.
다둥이를 낳은 여인들에게 주는 장려금은 고대로 갈수록 많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文武王) 10년(670) 6월, 한기부에 사는 여인이 3남 1녀를 낳자 벼 200석을 주었다고 한다. 200석을 현대의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4천만 원 이상의 거액이다. 이 돈은 당시 여인이 평생을 일해야 벌 수 있는 고액이었다. 이 여인보다 800여 년 후대인 조선 세종 때 종9품 관리가 한 해에 받는 곡식이 쌀과 콩을 합해 10석에 불과했다. 즉 200석은 세종 시대의 관리가 20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아야 모을 수 있는 금액이었던 셈이다.
경상도 감사가 아뢰기를,
“초계군(草溪郡)에 사는 사비(私婢) 약비(若非)가 세쌍둥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두 아이는 죽었습니다.”
하니, 대언사(代言司:승지)가 아뢰기를,
“한 태(胎)에 세 아들을 낳은 자는 쌀 열 섬을 주옵는데, 이제 둘은 죽고 하나만 산 것은 쌀을 주는 예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 태에 세 아들을 낳으면 현재(賢材)가 많다.’고 하였으니, 이 여자는 두 아들이 죽긴 하였으나, 그래도 역시 쌀을 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였다. 안숭선이 아뢰기를,
“전례가 없으므로 줄 수 없습니다.”
하니, 이를 예조에 내려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본조에서 아뢰기를,
“반을 감하여 닷 섬만 주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세종 13년(1431) 7월 5일
1431년 7월 5일 다둥이의 지원에 관해 세종과 관리들이 논쟁이 오간다. 그해 경상도 초계군에 사는 사노비 약비가 세쌍둥이를 출산하였는데 두 아이는 죽고 한 아이만 살아남은 것이 이 논쟁의 발단이 되었다. 이때 한 번에 세쌍둥이를 낳은 여인에게는 쌀 열 섬을 준다는 승지의 말을 통해, 당시에 세쌍둥이를 낳으면 쌀 열 섬을 지원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쌀과 함께 콩을 주기도 하였는데 10섬은 정해져 있는 불문율이었다.
다음으로 중요한 논쟁이 이어지는데 과연 다둥이의 정의를 출산으로 보는가, 생존으로 보는가의 문제였다. 승지의 경우 생존하지 못했으므로 이는 독자로 보아 지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세종은 옛말에 세 아들을 낳으면 뛰어난 인재가 많다라고 하며 두 아들을 잃었으나 지원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하들은 여전히 생존자를 기준으로 이를 판단했고, 결국 반을 감하여 5섬만 주는 것으로 절충안이 마련되어 지원이 결정된다.
세쌍둥이 이상을 낳아 곡식을 하사하는 일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충청감영계록(忠淸監營啓錄)』 철종 3년(1852) 5월 19일 기록을 보면 충주목(忠州牧) 양인 맹원조(孟元朝)의 처 박 소사(朴召史)가 세쌍둥이를 낳았는데 으레 사미(賜米)하는 전례에 따라 임금의 윤허를 받들어 집행한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반 백성들의 다둥이 출산은 많이 기록되어 있으나, 양반을 비롯한 왕실의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양반의 인구는 조선 전기에는 약 10% 정도이고 후기에는 40% 정도에 이른다. 일반적으로 인공의술이 아닌 자연조건에서의 쌍둥이 출산 확률은 0.3% 내외라고 한다. 즉 1천 명의 산모 당 3명꼴로 다둥이를 낳는 것이다.
『승정원일기』에는 인조 19년(1641) 6월 11일 유생 임태(任兌)의 아내 변씨(邊氏)가 세쌍둥이 딸을 낳았다는 기록을 비롯해 몇몇 양반 유생들의 아내가 셋 혹은 네 쌍둥이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또 『연려실기술』에는 인조 때 문신인 신천익(愼天翊)과 그 아우인 신해익(愼海翊)이 쌍둥이라는 기록과 개인 문집 등에 양반들의 쌍둥이 관련 기록들도 찾아볼 수 있음을 볼 때 양반들 역시 쌍둥이를 낳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태여 공식적으로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반면, 앞서 살펴보았듯 다둥이를 낳으면 쌀과 곡식을 지원해 주었기에 일반 백성들은 적극적으로 신고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의 왕자와 공주, 옹주는 약 300명에 이른다. 자연조건의 확률로 보면 쌍둥이가 없는 게 사실 이상한 점이 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세종과 신빈 김씨 소생인 영해군(寧海君)이 쌍둥이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 근거는 바로 왕자들의 태실이다. 성주의 태실에는 세종이 낳은 18명의 왕자 중 17명의 왕자와 손자인 단종 등 총 19기의 태실이 있다. 그런데 왕실족보인 『선원록』에 따르면 세종은 18남 4녀를 두었다. 하지만 세종의 왕자 중 문종은 성주의 태실이 모셔져 있지 않으므로 단종을 포함한 18기가 있어야 하는데 19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논란은 마지막에 모셔진 당(瑭) 왕자의 태실이다. 그동안 전주이씨대동종약원과 세종 후손들은 태실의 장(璋) 왕자와 당(瑭) 왕자를 모두 영해군으로 보았다. 『선원록』은 “9남 영해군의 이름은 당(瑭)이며 일명 장(璋)이라 한다.(九男寧海君瑭一作璋)”고 하였고, 『선원보』는 “9남 영해군의 이름은 당으로 원래 이름은 장이다.(九男寧海君瑭初名璋)”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영해군의 이름은 ‘장’과 ‘당’ 두 개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영해군의 태실은 첫 이름인 장으로 먼저 만든 뒤 개명 후 다시 설치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장’과 ‘당’이 다른 인물로 영해군은 쌍둥이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반면 성주군에서는 태지석에 음각된 출생일을 근거로 쌍둥이가 아닌 몇 년 차이의 형제로 보기도 한다. ‘장’ 왕자는 영해군이며, ‘당’ 왕자는 세종이 마지막에 낳았으나 족보에 기록되지 않은 19번째 왕자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쌍둥이 설과 19왕자 설은 일부의 주장에 불과하다.
전통시대와는 달리 현대는 다둥이 전성시대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해 평균 1만 5천여 건의 쌍둥이가 태어난다. 스트레스나 만혼(晩婚) 등의 이유로 난임(難姙)이 늘면서 인공수정과 시험관 아기 출산이 증가한 것이 큰 원인으로 파악된다. 일반적으로 인공 수정 등은 수정확률을 높이는 게 관건인데 이에 따라 여러 개의 난자 배란을 유도하고, 다수의 수정란을 이식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쌍둥이 출생 비율이 높아지는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난임의 많은 원인을 허증으로 보았다. 영양불량이 지속되어 자궁의 성숙도가 낮고, 혈액공급이 부족하면 임신과 출산이 어렵기 때문이다. 또 기혈허약(氣血虛弱), 신허(腎虛)와 함께 간울(肝鬱), 어혈(瘀血), 습담(濕痰)도 난임과 깊은 연관으로 파악했다.
요즘에는 배란 장애 외에 착상에도 주목을 많이 한다. 현대인은 착상 실패로 불임이 되는 비율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주요 원인은 자궁의 어혈과 허랭, 담음, 비만 등이다.
『동의보감』에서는 “자식을 얻기 위해서는 부인은 월경을 고르게 해야 하고 남자는 신(神)이 넉넉해야 한다.” “남자가 양정(陽精)이 부족하면 비록 혈해(血海)가 고요한 때를 만나도 자궁으로 직접 사정하지 못하고 흘러나가 대부분 잉태가 되지 않는다.” “부인이 자식이 없는 것은 대부분 혈이 부족하여 정(精)을 거두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임신의 어려운 원인에 대해 월경 불순, 혈의 부족, 정액 미약을 들었다.
그리고 이에 월경을 고르게 하고 혈을 기르는 것에는 백자부귀환, 호박조경환, 가미양영환, 가미익모환, 제음단, 승금단 등을 그리고 자궁의 혈을 기르는데 반하(半夏) 2돈, 남성(南星), 귤홍, 지각(枳殼), 적복령, 감초로 만든 도담탕(導痰湯)을, 양기를 건강하게 하는 데는 고본건양단, 속사단(續嗣丹), 온신환(溫腎丸), 오자연종환(五子衍宗丸) 등의 탕약을 활용하였다.
- 권인규(權仁圭:1843~1899) 『소운문집(巢雲文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