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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의 안내로 걸었던 기억이 있는 일산의 나즈막한 두 산을 다시 걷기로 마음먹은 건 금정굴때문이었다. 어느 길이든 사연이 없는 길이 없겠지만 금정굴의 아픔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현재 숙제형이라는 점에서 제주 4.3사태보다 더 가슴으로 다가왔다.  수도권에서 전철과 버스로 편하게 접근이 가능한 고봉산과 황룡산은 3시간 정도면 족하게 걸을 수 있는 편한 길이다. 일산의 진산이라 불리는 고봉산은 일산동과 성석동 사이에 위치한 산(해발 208M)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기 서로 각축을 벌이던 곳이다. 테미산으로도 불리는 이 산은 일산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곳곳에 많은 문화재가 있다. 고구려 시대에는 달을성현으로 불리우고 봉수대가 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황룡산은 고봉산 반대편에 있는 성석동과 탄현동과 파주시의 경계에 위치한 산(해발 134m)이다. 고봉산에서 이어진 산줄기가 북쪽으로 이어져 있으며 일산구의 가장 북쪽 끝에 해당하는 곳이다. 산 아래에 이천우 선생의 묘와 용강서원이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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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은 고봉산을 뜻한다고 한다. ‘일산(一山)’의 하나의 산이 바로 고봉산이라는 것이다. ‘고양(高陽)’도 고봉산에서 ‘고’ 자를 덕양에서 ‘양’ 자를 따온 것이라 한다. 그만큼 고봉산은 일산의 상징이다. 오늘 걸으려는 고봉산과 황룡산을 일주하는 길을 고봉누리길이라 부른다.  오늘은 고봉산삼거리가 있는 개미고개(숯고개)에서 출발해 고봉산을 오르고 황룡산을 거쳐 용강서원이 있는 상감천마을로 내려오는 코스로 잡았다. 숯고개에는 무료 대형 주차장이 있어 자가용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주차를 해놓고 원점회기를 하기도 한다. 고봉산과 황룡산이 이어지는 중산마을에서 봉일천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개미고개(고봉로 삼거리)인데 이 고개를 넘으면 봉일천과 파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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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 주민들은 고봉산하면 제일 먼저 100여미터의 송신탑을 먼저 떠올린다. 고봉산 철탑은 냉전 대체시대의 산물로 북한의 대남방송에 대한 방해전파를 쏘기 위해 세워진 시설이었다. 그러다 2000년대에 들어 대남방송이 약해지자 이 탑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일산 주민들은 이 철탑의 철거를 주장하고 있지만 아직도 고봉산 정상에 그대로 자리하고 있어 산 정상엔 가지 못하고 정상 아래서 걸음을 멈추어야 한다.


숯고개에서 우측으로 들어서면 쉽게 들머리를 찾을 수 있다. 편한 계단을 올라서면 바로 흙길로 접어든다. 그리 경사가 가파르지 않은 갈을 잠시 걸으면 커다란 바위가 보이는데 이 바위가 장사바위이다. 장사바위아래로 내려와 우측의 흙길로 들어서서 오르면 정자가 있는데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고 영천사 방면으로 길을 잡는다.


고봉산 정상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갈 수 없으니 바로 아래 헬기장 표지가 있는 곳이 실질적인 정상이다. 헬기장에서 보면 동쪽으로는 북한산 쪽이 바라다 보이고 서쪽으로는 중산, 탄현마을 아파트촌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고봉산에는 남쪽 영천사와 동쪽 망경사의 두 개 절이 있다. 영천사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대웅전과 요사채, 신선각 등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서 있어 길손을 붙잡는다. 영천사 샘물에서 시원하게 물을 한 잔 들이키는데 물맛이 제법 괜찮다.


영천사 가는 입구에는 이무기 바위와 붙임바위가 있어 눈 길을 끈다. 고봉산의 남서쪽을 지켜주는 바위라고 하는데 1천년 동안 공덕을 쌓으면 비로소 용이 되어 승천한다고 되어 있었다. 이무기 두상을 닮은 모습이라고 한다. 붙임바위도 있어 고봉산 곳곳에 장사바위 등 낮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바위에 관한 전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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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사를 기점으로 황룡산으로 가기 위해 다시 숯고개 방향으로 내려온다. 숯고개 주차장에서 길을 신호등을 건너면 바로 황룡산 입구이다. 이 초입에 우리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장승이 서 있다. 금정굴에 매장된 억울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일종의 추모지인 것이다.

해방 이후 고양 지역에서도 한국 다른 지역처럼 좌우익 대립이 심각하게 일어났었다. 6.25의 상흔이 그대로 남은 곳이 이 금정굴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이후 3일만에 고양 지역은 인민군에 넘어갔으나 아군이 북진하고 있으니 동요하지 말라는 라디오 방송을 믿고 피난하지 않은 주민들이 많았다. 북한군은 인민재판을 벌여 우익 인사들을 체포해 고문하는 만행을 벌이고 고양군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 선거를 치러 인민위원을 뽑았고 주민들을 인민의용군으로 강제 징집했다.


전쟁 발발 약 3개월이 지난 9월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져 9월 20일에는 능곡이, 9월 28일에는 일산이 수복되었다. 금정굴 학살사건은 그 이후에 발생하는데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부역자들을 색출해 인민위원장 등 부역자들을 사살했다. 10월부터 고양경찰서가 다시 복귀해 부역혐의자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는데 누가 부역자인지 가려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찰은 고문 등을 통해 임의로 이들을 분류해서 몇몇은 석방하고 몇몇은 금정굴로 끌고 갔다.


금정굴은 본래 동굴은 아니고 일제강점기 때 금 채굴을 위해 수직으로 파 놓은 굴이었는데 처음에는 굴 앞에 주민들을 세워놓고 총으로 쏘아 떨어뜨렸고 이후엔 굴 입구에서 총살한 후 굴 속으로 던져 버렸다. 희생자들은 처음에는 심사를 받는 줄 알고 금정굴 아래 공터에 모여 있다가 경찰에 지시에 의해 5~7명씩 현장으로 올라갔으며 한번에 20~40명씩, 많게는 47명까지 끌려가 학살되었는데 이런 학살이 20여 일간 이어졌다. 학살은 10월 말에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개입하면서 중단되었으며, 이후 의용경찰대원과 시국대책위원장 두 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처벌받은 경찰관은 없었다.


이후 학살 사건은 묻혀져 있다가 1993년 시민단체들과 유족들에 의해 문제가 제기되었고 1995년 현장 발굴에 나서 153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1999년 경기도의회는 고양 금정굴 양민학살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를 내 금정굴 사건이 경찰의 주도로 다수의 민간인을 불법 살해하여 암매장한 사건이라는 결론을 냈고 2006년에는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금정굴 사건에 대해 경찰 책임하의 불법 학살로 인정하였다. 이후 고양경찰서에서도 유감과 애도의 뜻을 표명했고, 법원도 금정굴 유족에게 국가 배상을 판결했다.


그러나 이 사건 당시에 발굴된 유해들은 안치할 곳이 없어 서울대병원 창고에 보관해 오다가, 2011년 고양시 청아공원 납골당으로 옮겨졌고 이후 계약기간 만료로 2014년 하늘문공원 납골당으로 다시 옮겨졌다. 2010년 새로 당선된 고양시장 측에서는 금정굴 유해를 안치하고 평화공원을 조성한다고 하였으나 보수단체 등의 반발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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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굴을 지나 오르면 이제는 편안한 흙길로 이어진다. 오늘의 마지막 여정인 용강서원을 찾아간다. 용강서원 앞에 서면 태극문의 태극 문양이 아주 선명한 홍살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홍살문은 신라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는데 고려시대를 거쳐 유교국가인 조선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나무 건축물로 출입문의 역할을 했지만 출입의 기능보다 상징성이 더 중요시 되었던 문이다. 형태는 한자 '門'의 형상에서 따온 것으로 주변에 담장이 없었기 때문에 방어를 하거나 출입을 통제하는 목적은 없다. 9m 이상의 둥근기둥을 지주석 위에 고정시키고 두 개의 기둥을 양쪽에 두고 문짝은 달지 않았다. 기둥과 기둥 사이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뾰족한 나무를 나란히 박아 연결하고 그 가운데에는 삼지창을 설치하거나 태극 문양을 설치했다.


홍살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은 기둥의 색을 붉은색으로 칠했고 상부에 설치한 화살모양의 나무살 때문이다. 붉은색은 악귀를 물리치고 화살은 나쁜 액운을 화살 또는 삼지창으로 공격한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홍살문을 설치하는 곳은 서원이나 향교에 설치하였으며 집안 재실에도 설치하였다. 홍전문(紅箭門)o홍문(紅門)이라고도 부른다.(두산백과)


용강서원은 '함흥차사'의 어원이 되었던 박순(朴淳)을 모시기 위해서 세워졌다. 원래 위치는 박순이 죽임을 당한 함경도 용흥강변이었는데 이곳에 재현해 놓은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태종에게 물려주고 머물렀던 곳은 함경도 함흥이었다. 태종은 이성계를 한양으로 다시 모시려 했지만 이성계는 거부했다. 한양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이 보낸 문안사(問安使)들을 모두 죽였다. 함흥으로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함흥차사였다.


박순은 죽음을 각오하고 이성계를 만나러 갔고 이성계는 마음을 움직여 결국 한양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한다. 하지만 박순은 결국 영흥강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성계는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신하들이 그 역시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자 어쩔 수 없이 "박순이 강을 건넜으면 살려두고 강을 건너지 않았으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성계는 박순이 강을 건넜을 것으로 짐작될 때가 돼서야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박순은 강을 건너지 못했고 죽음을 맞이했다.


용강서원이 세워진 것은 1686년, 숙종 때였다. 하지만 분단으로 용강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된 후손들이 1980년, 황룡산 자락에 용강서원을 세웠다. 현재 용강서원에는 박순 외에도 박순의 고조할아버지인 박서(朴犀) 장군의 위패도 함께 모시고 있다. 박서 장군은 고려 때 명장으로 귀주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다.


용강서원을 구경하고 나오는 길에 낯익은 건축물이 보인다. 지금은 보기 힘든 농수로이다. 농사를 짓기 위해 물을 끌어오기 위해 설치했을텐데 수도 시설이 좋아진 현시대에서는 사용할 일이 없어 어쩌면 흉물처럼 푸대접을 받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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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산과 황룡산은 고봉누리길로 개발되어 예전보다 더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지만 길 곳곳에 묻어있는 우리 역사를 같이 알고 걸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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