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수도인 서울 중심에 웅대하게 자리를 잡고 우리 궁궐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경복궁은 편리한 교통과 접근성 그리고 다양한 볼거리로 각광을 받고 있다. 오늘은 도심 속 궁궐문화를 배워보는 편안한 길을 걸어 본다. 친절한 궁궐길라잡이(경복궁 등 궁궐과 종묘를 찾는 내외국인에게 우리 역사와 가치를 설명하며 우리문화유산에 대한 올바른 시각과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보존하는 자원활동봉사자들의 모임) 덕분에 아름다운 궁궐 건축미와 우리 역사를 배우는 알차고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으니 누구나 한 번 꼭 순례를 하라고 권한다.
그냥 유명한 곳을 휙 한 바퀴돌아오지 말고 시간을 가지고 경복궁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찬란한 건축 기술과 함께 당시의 역사도 돌아보는 관람을 하는 것이 경복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 경복궁. 북으로는 북악산(백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져 왕도인 한양(서울) 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하다.
경복궁은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해 1592년 임진 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1867년 고종 때인 중건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해 중건된 경복궁은 500여 동이라는 수많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선 미로 같은 웅장한 모습 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 시설, 왕족들의 생활 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고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때 우리의 웅장한 문화 말살정책으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돼 근정전 등 극히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고 우리의 법궁을 무시하기 위해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어 경복궁의 존재를 가려버렸습니다. 지난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등 과거의 모습을 되찾으려 하지만 실제 모습 복원은 불가능한 실정이다.
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 되었고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경복궁의 주요건물 위치를 보면 궁 앞면에 광화문이 있고 동·서쪽에 건춘(建春)·영추(迎秋)의 두 문이 있으며 북쪽에 신무문이 있다. 궁성 네 귀퉁이에는 각루가 있다. 광화문 안에는 흥례문이 있고 그 안에 개천(開川) 어구(御溝)가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어구에 돌다리인 금천교(禁川橋), 곧 영제교(永濟橋)가 놓여 있고 다리를 건너면 근정문이 있으며 문을 들어서면 정전인 근정전이 이중으로 높이 쌓은 월대 위에 우뚝 솟아 있다.
근정전 뒤의 사정문을 들어서면 왕이 정사를 보는 곳인 사정전이 있고 그 동·서쪽에 만춘전(萬春殿)·천추전이 모두 남향으로 놓여 있다. 사정전 뒤 향오문(嚮五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연침(燕寢)인 강녕전이 있고 그 앞 동서 양쪽에 연생전·경성전이 있다.
강녕전 뒤에는 양의문(兩儀門)이 있고 문 안에 왕비가 거처하는 교태전이 있으며 잇대어서 동쪽에 원길헌(元吉軒)·서쪽에 함광각(含光閣)·동북쪽에 건순각(健順閣)이 있다. 그 뒤로는 후원이 전개되어 소나무가 우거지고 연못·정자 등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다. 흥례문으로부터 이곳까지에는 동서로 낭무(廊?)가 각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이밖에 궁 서쪽에 수정전이 있고 그 위에 경회루가 있는데 수정전은 의정부 청사로 쓰였던 곳이며, 경회루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또한 건춘문과 영추문 안에도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
현재 궁내에 남아 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전 등이며 복원된 건물은 강녕전·자선당·태원전·광화문 등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시대의 정궐(正闕)이다. 그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 왕조의 큰 복을 빈다는 뜻)"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景福宮)이라 하였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으로 천도하여 신도(新都)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게 된다.
1394년 9월 신궐조성도감(新闕造成都監)을 두고 해산(亥山:지금의 북악산)을 주산(主山)으로 삼아 임좌병향(壬坐丙向:北北西에 앉아 南南東을 바라다 봄)의 터를 잡았다.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宮井洞 일대)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山川神)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開基)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궁내(宮內)에 준성된 전각(殿閣)은 총 390여 칸이었다.
흥례문 일곽의 가운데에는 백악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 즉 금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도록 한 어구가 있고 어구의 중앙에 영제교(永濟橋)라는 다리가 놓여 있다. 어구(御溝)는 경복궁(景福宮) 뿐만 아니라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경희궁(慶熙宮), 덕수궁(德壽宮) 등에도 있다. 어구와 영제교(永濟橋)는 근정문에서 이루어지는 왕과 신하들의 조회 시에 신하들이 도열할 위치를 구별하는 경계이기도 했다.
금천교(錦川橋)
주산으로부터 흐르고 있는 비단처럼 부드럽고 좋은(錦) 기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지켜주는 금천이다. 바깥에서 궁궐을 공격하는 사악한 기가 궁궐에 들지 못하게(禁)하는 금천(禁川)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는 수영을 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이용한 풍수상 비보(裨補)로 명당수 금천을 둔 것이다. 그 다리의 양옆에는 천록(天祿)이라는 상상의 동물이 있다. 바로 명당수로 들어오는 악귀를 막는 역할을 하고 있고 영제교(永濟橋) 난간의 엄지기둥에서는 용을 발견할 수 있다. 용은 민간에서는 물을 다스리는 동물로 여겨 금천(錦川)의 난간에 장식된 것이라고 한다.
영제교를 중심으로 북쪽에 2품 이상의 관원이 서고 남쪽에 3품 이하의 관원이 정렬하였다. 흥례문 행각의 서북쪽에는 서쪽 궐내각사와 빈청으로 출입하는 유화문(維和門)이 자리하고 있다.
흥례문 일곽에서는 조회뿐만 아니라 국문이나 교서반포 등이 이루어졌으므로 궐내각사와 빈청의 관원들이 원활히 움직일 수 있는 문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유화문(維和門)이 한 것이다.
근정문(勤政門)
남쪽 행각의 가운데에는 3간으로 구성되어 있는 근정문(勤政門)이 있으며 그 좌우에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이 있고 동쪽 행각에는 융문루(隆文樓)가, 서쪽 행각에는 융무루(隆武樓)가 있다. 정전 영역의 입구인 근정문(勤政門)은 왕과 신하가 만나는 조참(朝參)행사를 하는 곳이다.
왕은 근정문(勤政門)의 가운데 칸에 어좌를 설치하고 남향으로 앉고 신하들은 흥례문 일곽에 도열하여 임금에게 예를 올렸다. 즉, 근정문(勤政門)은 단지 드나드는 출입문의 역할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 정치적인 활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2단으로 된 월대에는 정면 중앙에 답도를 두어 봉황(鳳凰)을 조각하고, 그 좌우에는 작은 계석을 놓고 계석의 우석으로 해태를 조각했으며 계석 측면에는 당초문(唐草紋)을 새겼다.
근정전(勤政殿)
국보 제223호인 근정전은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景福宮)의 중심 건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태조 3년(1394)에 지었으며 정종(定宗)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하기도 하였다.‘근정(勤政)'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이 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 다시 지었는데 처음 있던 건물에 비해 많이 변형되었다. 앞면 5칸·옆면 5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며 그 형태가 화려(華麗)한 모습을 띠고 있다.
상하의 기단에는 월대를 갖추고 있고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에 훌륭한 솜씨로 12지신상을 비롯한 동물들을 조각해 놓았다. 건물 안쪽은 아래·위가 트인 통층으로 뒷편 가운데에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가 있다. 어좌(御座) 뒤에는‘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병풍(屛風)을 놓았고 위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몄다.
근정전(勤政殿)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정승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햇빛을 가릴 때 사용하였던 고리가 앞마당에 남아 있다. 근정문(勤政門) 좌우로는 복도 건물인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勤政殿)을 둘러싸고 있다. 근정전은 조선 중기 이후 세련미를 잃어가던 수법을 가다듬어 완성시킨 왕궁의 위엄을 갖춘 웅장한 궁궐건축이다.
드므
근정전 기단 상부에는 전석을 깔고 전면 좌우에 청동향로(靑銅香爐)를 배치하였으며 하월대(下月臺) 동·서측 계단 옆에 무쇠 드므를 놓아 화재(火災)에 대비했다.
청동향로(靑銅香爐)
근정전에서 의식이 거행될 때 왕이 어좌(御座)에 오르면 근정전 밖의 좌우 향로(香爐)에 향을 피웠다.사정문(思政門)
사정전(思政殿)과 사정문(思政門)의 이름은 정도전(鄭道傳, 1342년~1398년)이 지은 것으로 “천하의 이치를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는다. 임금이 진실로 깊이 생각하고 세밀히 살피지 않으면 어떻게 사리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더욱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경연과 정사가 주 기능인 편전(便殿)에 걸맞은 이름인 것이다.
사정전(思政殿)
보물 제1759호인 경복궁안의 편전(便殿)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각지붕의 다포집으로서 1867년(고종 4) 건립 사정문(思政門)을 들어서서 마당보다 약간 높게 원주(圓柱)를 세웠으며 4면의 기둥 사이는 토벽(土壁)이 하나도 없이 사분합(四分閤)의 광창(光窓)과 문만으로 짰다. 내외 이출목(二出目)의 공포(拱包)로 짜여져 있고 지붕마루는 양성을 하였으며 망새·용두(龍頭)·잡상(雜像)을 배열하였다.
경회루(慶會樓)
국보 제224호로서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에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그 뒤 임진왜란(任辰倭亂)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고쳐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이때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는 왕비의 침전 뒤편에 아미산(峨嵋山)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태종 때에는 48개의 기둥에 꿈틀거리는 용을 조각하였으나 다시 지으면서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기둥을 세웠다. 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 높이를 달리하여 지위에 따라 맞는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경복궁 경회루(慶會樓)는 우리 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현재의 경회루는 고종 4년(1867)에 중건된 것이다. 다시 지어진 경복궁의 많은 건물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회루는 중건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여 왔다.
연못 주변에는 담장이 둘러쌓여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동o서o남o북의 담장이 철거되었으며 2004년~2005년에 각각 북쪽과 동쪽 담장이 복원되었다. 경회루로 가는 3개의 돌다리에는 벽사의 의미를 가진 동물상이 새겨진 엄지기둥을 놓았다.
사정전을 뒤돌아 가면 행각에 연이어 있는 향오문이 나오는데 이곳이 궁궐의 침전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경복궁에는 왕과 왕비의 침전영역이 둘로 구분되어 있다. 하나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이고 다른 하나는 강녕전의 후면에 있는 양의문을 통해 들어가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이다.
궁궐에서 침전은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며 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內進宴)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사와 관련한 일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은밀히 정사를 논의하는 곳 또한 침전이다.
강녕전 (康寧殿).
왕이 일상 거처하던 전각(殿閣)으로 1395년(태조 4)에 창건하였으며 정도전(鄭道傳)이 건물의 이름을 지었다. 강녕은 오복(五福)의 하나로 임금으로서 해야 할 이상적인 정치이념을 궁궐 건축에 반영한 유가(儒家)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1553년(명종 8)에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이듬해 중건하였으나 다시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재건하였다.
그 후 1920년까지 제자리에 있었으나 1917년에 불타 없어진 창덕궁(昌德宮) 내전(內殿)을 다시 짓는다는 구실로 일본인들이 강녕전(康寧殿)을 헐어버리고 일부는 내전(內殿)을 짓는 데 사용하였다. 1995년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12개동 794평이 복원되었다.
경성전(慶成殿)
대침소인 강녕전의 동소침(東小寢) 이름이 연생전(延生殿)이고 서소침(西小寢) 이름이 경성전(慶成殿)이며 연길당, 응지당 등 5채의 건물들이 이어져 있다. 그러나 고종 때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연길당(延吉堂)과 응지당이 추가되었으므로 중종 당시에는 연생전과 경성전만이 강년전을 보좌하고 있었다.
이 5채의 건물은 우주의 기본 요소인 오행을 상징하고 위엄 있게 들어서 있으며 '강녕'이라는 이름도 오복 가운데 대표적이다. 연생전(延生殿)과 경성전은 왕이 천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인(仁)과 의(義)를 지니라는 뜻에서 만들어진 건물이다. 연생전(延生殿)은 봄에 만물이 생겨나는 듯하고 경성전(慶成殿)은 가을에 결실을 이루게 하는 듯 하다.
교태전(交泰殿).
경복궁안의 왕비의 침전으로 조선 태조가 건국한 지 3년 후인 1394년에 경복궁역사와 더불어 창건하였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후 1555년(명종 I0) 8월에 다시 지었으나 이것 역시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소실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869년(고종 6년)에 새로이 창건한 것이다.
교태전 후원 아미산(峨嵋山)
아미산(峨嵋山)에는 다양한 화초를 심어 화계를 꾸미고 교태전 온돌에서 나오는 연기가 빠져 나갈 수 있는 굴뚝을 세웠다. 또한 호수나 연못을 상징하는 모양의 석함(石函)을 두어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풍경(風景)을 조성하였다.
자경전 꽃담
대비전인 자경전(慈慶殿)의 서쪽담장 외벽에는 매화, 천도, 모란, 국화, 대나무, 나비, 연꽃 등을 색깔이 든 벽돌로 장식(裝飾)하여 아름다운 조형미(造形美)를 보여준다.자경전(慈慶殿)
경복궁 침전 동쪽 터에 자리한 보물 제809호인 자경전(慈慶殿)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高宗)의 양어머니가 되었던 대비(신정왕후)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건물을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44간의 규모로 지어진 이 건물은 온돌방으로 꾸며진 복안당과 자경전, 동남쪽의 청연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연루의 동측으로 협경당이 연결되어 있다. 자경전(慈慶殿) 남쪽으로 행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 여자들이 여닫기 쉽게 가벼운 당판문으로 된 만세문이 있다.
자경전 뒤편에는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처럼 화계를 꾸미지는 않았지만, 보물 제 810호인 십장생과 박쥐문, 당초문을 새긴 굴뚝을 세워 볼거리를 만들었다. 또 서쪽 담은 주황색 벽돌로 축조하여 내벽에는 만수문, 격자문, 육각문, 오얏꽃 등을 정교하게 새겨 넣고 외벽에는 매화, 천도, 모란, 국화, 대나무, 나비, 연꽃 등을 색깔 있는 모양벽돌로 꾸며 격조를 높이고 있다.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십장생 무늬와 당초문, 그리고 박쥐문을 정교하게 새겨 넣어서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조형미를 보여주는 굴뚝, 기존의 담장에 기대어 쌓아 흡사 담장의 일부처럼 보이게 한 재치도 돋보인다.
향원정(香遠亭)
보물 제1761호인 향원정(香遠亭)은 1873년 고종이 건청궁(乾淸宮)을 지을 때 그 앞에 연못을 파서 연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어 2층의 육모지붕을 얹은 정자이다. 향원정(香遠亭)으로 가는 섬에는 나무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취향교라 하였다.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 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년이고 향원지(香遠池)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물은 경회루(慶會樓)의 연지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취향교와 향원정. 다리는 원래 뒤족에 있는 건청궁쪽에서 건널 수 있게 놓았다는데 지금은 남쪽에 놓여져 있다.
경복궁 중건사업이 끝난 이듬해인 1873년 고종은 경복궁 북쪽 동산정원인 녹산(놋산)과 향원정 사이에 건천궁을 건립하게 하고 명성황후가 기거하였다. 건청궁의 건축양식은 궁궐의 침전양식과는 달리 양반가옥 살림집을 응용하여 사랑채(장안당), 안채(곤녕전), 부속건물(복수당), 행각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규모는 양반가옥 상한선인 99칸의 2.5배 되는 250칸이다.
건청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발전기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가설된 곳이기도 한데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곤녕함에서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곤녕합(坤寧合)
명성황후(明成皇后)가 1884년부터 1895년까지 침전으로 사용하던 건물로1895년(고종 32년) 10월 8일 일본인 자객에 의해 시해되어 을미사변이 일어난 곳이다. 곤녕은 도덕경에 '하늘은 하나로 맑고, 땅은 하나로 평안하다' 라고 한 것에서 건천곤령(乾淸坤寧)이란 사자성어가 나왔다. 임금은 하늘같아서 세상에 질서가 서고 황후는 지내기 편안한 땅처럼 만물을 길러야 한다는 뜻이다.
자선당 기단과 주춧돌
자선당은 일제강점기 때 경복궁 철거에 앞장섰던 오쿠라가 일본의 자신의 집으로 옮겨서 ‘조선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설 박물관으로 사용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이 건물은 불타 없어지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자리에 오쿠라호텔이 들어섰다. 호텔 정원에 버려져 있던 기단과 주춧돌은 1995년에 경복궁으로 다시 돌아 왔으나 화재로 인해 훼손되어 자선당 복원 때 쓰이지 못하고 건청궁 동편 녹산에 보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