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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EO 칼럼

우리 선조의 세계 제패를 입증하는 유물, 황금 보검

이 융 포렌 대표이사

우리나라 보물 635호인 ‘황금 보검’은 기원전 6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이 보검을 보면 우리가 보통 보검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즉 역대 왕실에서 왕가의 보물로 내려오는 것이나 장군들이 사용한 검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그리스 로마 영향을 받은 보검이라 느껴진다. 이런 모양을 갖는 보검이 어떻게 경주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하게 되었나 생각만 해도 신비롭다. 전체 길이가 36cm 정도로 작은 것으로 장식용이라기 보다 무엇인가를 증명하는 중요한 물품이라 보는 것이 맞겠다. 모양새를 보면 손잡이 끝이 반원 모양을 하고 있고 칼집은 끝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모양을 하였고 옆에 금구를 한 장식이 붙어 있다. 그리고 표면은 누금 장식과 보석으로 화려함을 가했다. 이런 모양의 보검은 아주 특이하다. 어쩌면 세계에 단 하나만 있는 보검일 수도 있다고 상상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검이 카자흐스탄과 흑해 연안에서도 발견 되었다. 또한 우즈백족의 조상이 되는 월지족이 거주했던 크림반도와 이탈리아에서도 발견되었다는 것은 아주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라 추정된다. 그럼 유럽에서 한국의 동남쪽 끝인 경주에까지 분포하게 되었는지 심히 궁금증을 유발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흉노족은 아시아의 북부 초원지역에서 발원하여 철기 문명을 기반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어 중국의 중원을 넘보는 기마 민족의 집합체로 강성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만리장성은 진시황제가 쌓았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 전국시대에 흉노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왕조가 각각 자기 나라의 국경을 지키기 위해 쌓은 장성을 서로 연결하여 만리장성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이는 중국의 역대 왕조는 항상 흉노의 침략에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흉노족의 힘은 정말 막강하였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흉노를 물리치기 위해 30만 대군을 이끌고 그 당시 흉노족의 선우인 묵특선우와 맞싸웠지만 유방은 백등산에서 무려 7일간이나 포위되어 있다가 온갖 수모를 겪고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화친의 내용을 보면 첫째로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 시킨다. 둘째 한은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받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 화친은 기원전 198년 가을에 발효 되었다.


이 조공 관계는 한 무제가 집권하기 전 60년간 지속되었다. 무제가 즉위하고부터 흉노에 강경한 대응을 가하여 서로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많은 피해를 낳는다. 그 피해로 한나라는 흉노의 한 일파인 왕망에게 왕권을 빼앗긴다. 흉노는 내분으로 기원전 57년에 동. 서로 나눠 서로 전쟁을 벌인다. 서흉노는 동흉노에게 패하여 서쪽으로 우랄산맥을 넘어 시르다리아 강 중류에 다다른다. 신나라의 왕망은 후한 광무제에게 패망을 하는 중국 역사에 가장 짧은 왕조가 되었다. 후한 시대에도 서기 350년까지 흉노는 한나라와 전쟁을 하였다. 하지만 내분으로 남흉노와 북흉노로 나뉘어지면서 세력이 약해져 서쪽으로 물러난다. 370년경에 혹독한 한파가 서천을 한 흉노들을 남서쪽으로 이동하게 만들어 결국 게르만족을 밀어내는 형세가 되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란 세계사의 큰 이변이 발생한다. 게르만족의 이동이 결국 로마를 분열시키고 훈(흉노)족의 왕인 아틸라에 의해 유럽은 지배당한다.

 

한나라 무제 때 흉노와 치열한 싸움을 한 이야기를 앞에서 하였다. 그 시기 기원전 122년에 한나라 장수 곽거병은 감숙지방에서 흉노를 공격하여 패하게 만든다. 이 당시 선우인 이치 선우는 그 책임을 물어 혼야왕과 휴저왕을 죽이려 했다. 이에 두 왕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한나라에 항복하려 했는데 도중에 휴저왕이 항복을 망설이자 혼야양이 휴저왕을 죽이고 휴저왕의 큰아들 일(일제)과 동생 윤은 어머니와 함께 포로가 되어 한나라에서 마부로 살아가게 된다. 두 왕자는 무제에게 발탁되어 제천금인을 뜻하는 김씨 성을 하사 받는다. 무제는 김일제를 거기장군에 임명하고 어린 황제를 보필하라는 유조를 남겼으면 김일제를 제후국의 왕인 투후로 봉했다. 김일제의 5대손인 성한왕이 신라로 들어와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되고 김일제의 동생인 윤의 5대손 탕이 가야로 들어와 가야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휴저왕의 후손이 신라와 가야로 오게 된 배경은 왕망이 김일제의 증손자인 당의 이모부였기 때문이다.

 

왕망이 신을 세울 때 김씨 일가가 상당한 공헌을 했는데 광무제 유수가 신을 멸망시키고 후한을 건설하자 김일제의 후손들은 피의 숙청을 피하여 휴저왕의 후손 대부분은 휴저국으로 도주하여 성을 왕씨로 바꾸고 살았지만 그 중 한 갈래가 신라와 가야로 들어오는데 그들 중 김일제의 후손인 미추가 신라왕이 되자 그 내력을 문무왕의 능비에 새겼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서북, 김해, 제주 방에서 왕망시대의 화폐 오수전과 화천 등이 출토되는 것도 이들이 국외로 도피 할 때 가져온 것이라 해석이 있다. 이들이 중원에서 한반도 남쪽으로 온 것에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이유에 대하여 철기문화와 연관성을 두고 이야기 하는 학자들이 있다. 흉노족은 일지기 철기를 다루는 민족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철기 문화를 알고 있는 족속은 철이 많이 나고 질이 좋은 철을 생산하는 곳인 한반도의 남쪽을 택한 것이 아닌가 추축을 하게 된다. 흉노가 번창한 시기는 무려 600년이란 세월이다. 그 당시에도 부족들의 왕래는 있었다고 보면 질 좋은 철이 생산되는 곳은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황금 보검이 유럽과 한반도까지 분포하여 나타난 것을 시기적으로 보면 흉노족이 번창한 시기라 하겠다. 중국의 역사에 삼국시대에 오나라고 위나라를 치기위하여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하는 국서에 고구려왕을 선우라고 칭한 사실을 보면 선우의 위치는 대단한 것이고 아탈리가 유럽을 지배하던 시기에 흉노족의 선우는 다른 지역의 선우에게 그 지역의 통치자로 서로 인정하는 일종의 증명서 같은 것이 있었다고 보여 진다. 고대 벽제에서도 칠지도를 일본에 준 기록이 있는 것과 같은 의미라 하겠다.

 

보검의 제작 기법이나 재료가 다양한 것은 그 만큼 흉노족의 영향이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미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본다. ‘로마문화 왕국 신라’라는 책을 쓴 요시미즈 츠네오씨의 주장에 의하면 재료는 페르시아에서 들어왔고 제작기법은 로마식인 것으로 보아 로마에서부터 온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황금보검을 로마제국으로부터 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당시 훈족의 국력은 절정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훈족이 로마제국에 OEM방식으로 제작을 주문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훈족은 당시 유럽 지역을 석권하고 나서 당시 페르시아와 인도 지역을 통치하던 같은 스키타이 계열의 쿠산왕조에게 귀금속을 제공해 줄 것을 요구해 로마제국에서 최종적으로 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그 당시 만들어진 황금보검이 가지는 의미는 A.D 4-5세기경, 국경이 절정에 달했던 스키타이계 국가들이 자신들의 세력이 어느 정도 거대한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각지에서 귀금속을 수입하고 유럽 최강의 국가였던 로마제국에 요구해 만들게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이 보검을 받은 왕국들은 그 당시 스키타이계 민족국가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골품의 서열이나 정통성이 높았던 국가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신라 고분에서는 어김없이 금귀고리, 목걸이, 팔찌 등이 발견된다. 이 귀금속은 누금기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이 기술은 로마로부터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스 로마를 흡수한 지역의 지배자와 신라 지배자의 관계는 의례적인 사신을 파견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술자를 파견해 당대의 최고 기술을 전수 할 정도로 밀접했음을 보여준다.  이 당시에 이미 서로 왕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있는 아프라시암 궁전 백화에 보이는 신라 사신의 모습은 과거의 문물교류가 활발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역사는 유적과 유물로부터 시작하여 정확한 역사를 이야기 할 수 있다. 묵특선우가 한 유방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는데 후대의 역사가는 치욕적인 역사를 미화시켜 기록으로 남긴다. 우리의 역사관은 현재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 것인가 경주에서 발견된 황금 보검은 우리 선조가 세계를 제패한 것을 입증하는 유물이면서도 이를 단순한 보물 정도로 후손에게 교육을 하고 있는 작금의 역사 교육에 심한 우려를 남기고 싶다.    ◆

 



참고문헌 :

이종호 2007 ‘한국 7대 불가사의’ 역사의 아침

김정민 2016 ‘단군의 나라 카자흐스탄’ 글로벌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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